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곤명면지



곤명면지

24. 금성리(金城里)   금성교(金城橋)를 사이에 두고 완사평야(浣紗平野) 북쪽에 위치하여 면소재지(面所在地)에서 5km거리(距離)이다.   신라(新羅)가 가락국(駕洛國)을 귀속(歸屬)시킨 후(後) 신라국사(新羅國師)가 이곳을 둘러보니 대강(大江)이 주위(周圍)를 싸고 절벽(絶壁)과 험산(險山)에 둘리어 가(可)히 천혜(天惠)의 요쇄지(要塞地) 였으므로 축성(築城) 하였으니 성명(城名)이 금성(金城)이고 동명(洞名)이 이에따라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지(城址)는 가야(伽倻)시대의 것으로 지금도 있으며 통일신라(統一新羅) 시대(時代) 금능현(金陵縣)을 두었던 곳이라 하며 발견(發見)된 유물(遺物)로는 신라시대(新羅時代)의 삼정(三井) “기와(瓦)와 김동불(金銅佛)이 출토(出土)되었다.   연광정(練江亭)은 임란(壬亂)뒤 건립(建立)된 학당(學堂)으로 많은 유사(儒士)를 배출(輩出)하였으며 또한 명사(名士)의 시론장(詩論場)으로도 오랜 전통을 갖고 있어 문화재(文化財)로 지정(指定)하여 줄것을 당국(當局)에 건의(建議)한 바 있으나 성사(成事)는 되지않고 있다.   또 이곳에 영사재(永思齋)가 있는데 300년전에 앞들에 건립되었다가 훼손되고 180 여년전에 재건(再建) 된것이니 현 위치(現位置)로 이건(移建)한 것이라 한다.   덕천강(德川江)의 도선(渡船)은 촌락(村落)이 생긴 신라(新羅)때부터 나룻배가 있었다고 볼수 있으며 이천년의 영고성쇠(榮枯盛衰)를 간직하면서 유일한 교통수단으로 존속하다가 1965년 전동재(全洞財)를 투입(投入)하고 겸(兼)하여 한형구(韓炯久) 군수(郡守)와 김용순의원(金容珣議員)의 도움으로 숙원(宿願)이던 조교(釣橋)를 가설(架設)한바 있으나 1967년의 대홍수(大洪水)로 유실(流失)되어 다시 나룻배로 되돌아 갔다가 1974년 당시(當時) 국회의원(國會議員) 최세경(崔世卿)의 후원(後援)으로 철근(鐵筋) 콘크리트교(橋)가 폭(幅) 4.2m 전장(全長) 166m의 교량(橋梁)이 준공(竣工)되어 대평면(大坪面)과도 통행(通行)이 소통(疎通)되어 교통(交通)이 매우 좋아 주민(住民)의 생활향상(生活向上)에 큰 도움을 하고 있다.   곤명(昆明)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3.1독립만세(獨立萬歲)의 첫 봉화(烽火)를 올린곳이 금성(金城)이고 또한 금성리가(金城里歌)를 제정(制定)하여 금성(金城)리민(里民)이라는 전통(傳統)과 긍지(矜持)를 간직하고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참고로 금성리가(金城里歌)를 옮겨 보면 이영수(李永秀), 이준호(李駿鎬) 작사(作詞) 김정홍(金正洪) 작곡(作曲)으로 되어 있다.   1. 옛날에 금능현 파문힌 성터에   당산봉 소나무 추억만 남기고   흘러간 옛날에 애석도 할제   불곡사 옛터에 찬바람 분다   2. 복지다 옥지다 낙원의 금성들   덕천강 맑은물 옥녀봉 싸돌고   강건너 옥녀봉 옥녀가 놀든곳   흘러간 옛날에 추억만 그립다   이 마을은 1975년부터 동계(冬季)에 하우스 재배(栽培)를 실시(實施)하여 소득(所得)이 크게 향상(向上)된 곳이며 우수품질전통(優秀品質傳統)을 세울려고 박스(箱子)에 “금성” 표지(標識)를 넣어 출하(出荷)하고 있으며 작목반(作目班)도 편성(編成)하여 고소득(高所得)에 박차(拍車)를 가(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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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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