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두인리(斗印里) 본촌리(本村里)의 동남향(東南向)에 위치하며 덕천강(德川江)을 사이에 두고 있다. 신라시대(新羅時代) 금능현(金陵縣) 현인(縣印)이 보관(保管)되었던 곳이라 하여 두인(斗印)이란 마을 이름 유래(由來)가 나왔다 한다. 당시 현인(縣印)이 사각형(四角形)이였음으로 옛 양기(量器)인 말(斗)이 정사방형(正四方形)이라 여기에 따른 동명(洞名)이다. 청과류(靑果類) 산지(産地)로서 명성(名聲)이 있었으나 1965년 경지정리(耕地整理)로서 거의가 수도작(水稻作)으로 변하였으나 아직도 많은 양(量)이 생산되고 있다. 두인(斗印) 땜은 1928년 곤명수리조합(昆明水利組合) 창실(創設)로 옛 들보(洑)를 콘크리트 조(造)로 한것인데 전장(全長)이 225m이고 높이가 2m로 축조(築造)되어 강면(江面)의 에프론 세멘트 바닥 주위에는 담수어(淡水魚)가 많이 잡혀 관광(觀光)의 명소(名所)로서 각광(脚光)을 받고 있다. 오룡(五龍) 덤은 두인(斗印) 땜안에 위치(位置)한 벼랑으로 깊은 쏘(沼)와 직각(直角)의 암벽(岩壁)이 신비(神秘)를 이루워 장관(壯觀)함을 볼 수 있으니 이 쏘(沼)를 오룡(五龍)쏘라 하며 명주꾸리 3개를 넣어도 끝이 닿지 않는다 하는 깊은 쏘(沼)로서 쏘(沼) 가운데 바위를 “용의집 바위”라 하며 바위 깊숙이 암굴(岩窟)이 있어 사람들이 두러워하는 금기(禁忌)의 지역(地域)이다. 그 옛날 다섯 마리의 용(龍)이 승천(昇天) 하였다 하여 오룡(五龍)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마을과 앞들을 둘러싼 제방(堤防)은 1920년 일본인(日本人) 미전(尾田)과 이규필(李圭弼)의 공동(共同) 축조(築造)로 500m거리 였으나 1968년 남강(南江) 땜 건설시 수해방지책(水害防止策)으로 크게 보완하여 현재(現在)는 길이 2,000m에 폭 4m이고 산책로(散策路)로서 또한 교통로(交通路)로서 이용되고 있다. 강변(江邊) 일대에는 자갈 깔린 맑은 물과 숲으로 풍류객(風流客)이 찾는곳이 되고 특히 봄철에는 원근(遠近)의 소풍객(消風客)드로 분비고 있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