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곤명면지



곤명면지

14. 성방리(城方里)   곤명(昆明)이 4개면(個面)으로 분리(分離)되어 있을적에 성방면(城方面)의 소재지(所在地)였고 성지(城地)가 있으므로 성방(城方)이라 호칭(呼稱)되어오고 있다.   사립재의 능선(陵線)을 따라 곤양면포곡(昆陽面浦谷)과 접(接)하고 있는 마을로 쇠다리(牛橋) 난시골 조매동(早梅洞) 딱밭골(楮田洞) 샘이골(井洞)의 다섯 마을로 산재(散在) 되어 있다.   “쇠다리”는 마을 뒷산(山)이 와우형국(臥牛形局)으로 소(牛)가 발을 뻗은 자리로 마을이 생겼다는 뜻이지만 한문(漢文)으로 우교(牛橋)라 쓴것이 그대로 이어져 오고 있다.   조매동(早梅洞)은 매화목(梅花木)이 많이 있었다는 뜻에서 동명(洞名)이 나왔고 저전동(楮田洞)은 딱나무 밭이 많은 곳이었다.   샘이골(井洞)은 골이 깊고 물이 좋은 곳이므로 여기에서 연유(緣由)된 것이다.   산성(山城)은 임란(壬亂)때 왜군(倭軍)이 사천선진(泗川船津)에 축성(築城)하여 교두보(橋頭堡)로 삼으니 이에 대항(對抗)코저 주민(住民)들이 성(城)을 쌓았다 하며 충주석씨(忠州石氏)의 피난지(避難地)이고 딱밭골(楮田洞) 앞의 큰 돌다리(石橋)는 석장군(石將軍)이 놓은 다리라고 지금도 말하고 있다.   벼락산(山)에는 신선(神仙)바위가 있으니 옛날 신선(神仙)이 학(鶴)과 장수(長壽) 자랑을 하다가 학의 비위를 거슬러 학이 날아가 버리자 하늘이 이 바위에 벼락을 때려 크게 갈라지게 만들었으니 그 신비(神秘)함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우교(牛橋)앞 정자(亭子) 나무는 수령(樹齡)이 300년으로 휘귀수(稀貴樹)인 입화목(立花木)이니 보호수(保護樹)가 되어 있으며 나무밑 바위에 새겨진 은거별장(隱居別庄)이란 각자(刻字)는 옛날 도사(道師)가 삼방지중(三方之中)의 선인독서(仙人讀書) 명지(名地)를 설(說)함과 동시(同時) 주변(周邊) 8개소(個所) 이름을 붙이고 노숙(露宿)한 곳으로 글도 도사(道師)가 자각(自刻)한 것이라 한다.   곤양면(昆陽面)과 접(接)하고 있는 사립재(仕立峠)는 진주(晋州) 산청(山淸) 등지에서 곤양(昆陽)으로 통(通)하는 대로(大路)였으니 곤양(昆陽)의 동북방(東北方) 관문격(關門格)이라는 뜻에서 민가(民家)의 사립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고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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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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