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오저리(梧苧里) 오저(梧苧)는 봉계리(鳳溪里)에 속(屬)한다. 초량천(草梁川)을 사이에 두고 오천(梧川) 저동(苧洞)의 양(兩) 땀을 합한 것이 오저(梧苧) 부락이며 구한말(舊韓末)때 초량면(草梁面) 사무소(事務所)가 소재(所在)하고 있었다. 오천(梧川)은 뒷산이 봉황산(鳳凰山) 임으로 봉(鳳)은 오동(梧桐)나무에 깃든다 하여 산에 오동나무를 심었다 하고 마을 앞에 초량천(草梁川)이 흐르고 있으므로 오천(梧川)이란 동명(洞名)이 된 것이다. 저동(苧洞)은 옛날 모시(苧)가 많이 생산된 연유(緣由)에서 나온 말이고 세종(世宗)때 곤남군(昆南郡)으로 있을적에 군(郡)의 공식(公式) 공물(貢物)이 문헌(文獻)에 있음을 볼적에 이 마을 모시베(布)가 진상(進上) 되었음이 추측된다. 오천(梧川) 뒷산에 “봉알자리”라는 명지(名地)가 있는데 청주한씨(淸州韓氏)의 묘지(墓地)이다. 비봉포란(飛鳳抱卵)이라 하여 후손(後孫)이 근접(近接)하면 봉(鳳)이 날라 산운(山運)이 없어진다 하여 지금도 후손(後孫)들의 성묘(省墓)때는 먼데서 망배(望拜)만 한다. 봉계초등학교(鳳溪國民學校)와 원전진료소(院田診療所)가 소재(所在)하고 있으며 특산물로는 영지(靈芝)버슷이 생산(出産)되고 있다. 오천(梧川)과 저동(苧洞)의 마을앞에 각 한 그루씩의 느티나무가 있어 마을을 한층 돋 보이게 하고 있다. 다솔사역(多率寺驛) 건너편 높은 벼랑은 암굴(岩窟)이 있으니 석기시대(石器時代)에 사람이 살던 곳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