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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명면지

10. 대한민국시대(大韓民國時代)   1945년 8월 15일, 조국(祖國)은 일제의 강점으로부터 드디어 광복(光復) 되었다.   그러나 연합군사령부는 8월 25일에 미.소 양군이 38선을 경계하여 한국을 분할 점령한다고 발표하므로써 조국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남한에는 9월 7일에 미군정청(美軍政廳)이 설치되고 이로부터 정부(政府)가 수립될 때까지 미군정(美軍政)이 시행되었으며 소련군(蘇聯軍)은 이에 앞서 8월 24일에 북한의 평양(平讓)을 점령하고 사령부를 설치했다.   한편 본 면에서는 곤명지서(昆明支署) 이외에 완사지서(浣沙支署)가 하나 더 설치되고 또 곤명의용소방대(昆明義勇消防隊)와 완사의용소방대(浣沙義勇消防隊)가 설치되었다.   이런 가운데 1947년 11월 14일에는 유엔총회에서 한국의 총선거안과 정부수립 후 양군의 철수안을 가결하고 1948년 1월 8일에는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이 내한하여 소련군 사령관에게 입북(入北)을 요구하였으나 소련측이 이를 거부하므로써 부득히 유엔소총회에서는 2월 26일에 [남한에서만 임무를 수행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하여 1948년 5월 10일에는 첫 국회의원의 선거가 있었고 5월 31일에는 제헌국회의 개원식을 거행하였으며 6월 10일에는 국회법 통과가 있었다.   또 7월 1일에는 국호를 대한민국(大韓民國)으로 결정하고 8월 15일에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선포함과 동시에 미군정청을 폐지하였으며 12월 12일에는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정부를 한국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승인하였다.   1949년 6월 21일에는 농지개혁법이 공포되고 7월 4일에는 지방자치법이 제정 공포되었으며 8월 15일부터는 이 법이 시행되었다.   이와같이 국가의 기반이 차츰 정비될 무렵인 1950년 6월 25일에는 북한 공산군이 38선 전역에서 남침해 왔다.

  그리하여 정부는 6월 27일에는 대전으로 7월 16일에는 대구로 8월 18일에는 부산으로 옮겨졌다.   한편 전라도 방면으로 남침을 계속해 온 공산군은 7월 29일의 하동 침략에 이어 30일에는 하동에서 진주방면으로 진출했고 31일에는 본 면을 침략하였으며 8월 1일에는 진주마져 침략했었다.   이때 본 면의 원전(院田)과 완사(浣沙) 지역은 면사무소를 비롯한 100여호의 민가가 소실되어 페허가 되었었다.   이에 앞서 유엔안보이사회에서는 한국군원조를 결의한바 있었다. 그리하여 7월 1일에는 연합군 지상군부대가 부산에 상륙했고 9월 15일에는 인천 상륙작전이 있었으며 9월 16일에는 낙동강 전선에서 총반격전을 개시하므로써 9월 20일에는 진주와 본 면이 수복되었었다.   이러한 반격전은 드디어 10월 19일에는 평양을 탈환했고 10월 25일의 중공군 개입에도 불구하고 10월 26일에는 압록강변의 초산(楚山)까지 도달했었는데 중공군과 북한 공산군의 총반격으로 12월 4일의 평양철수에 이어 1951년 1월 4일에는 이른바 1.4후퇴라는 또 한차례의 쓰라림을 겪기도 했었다.   그러나 1월 22일의 전면 반격개시에 이어 1월 26일에는 해병대에 의한 인천 상륙작전이 있었고 2월 10일에는 다시 서울에 진입하였으며 3월 14일에는 서울을 재수복하는데 성공했다.   3월 24일에는 [맥아더]유엔군사령관에 의하여 이북 진격명령이 내려졌고 이에 총공격을 가하여 25일에는 드디어 38선을 돌파했다.   12월 1일에는 부산 대구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12월 2일부터는 공비토벌작전이 시작되었다.   이와같이 정국(政局)이 아직 안정되지 못한 속에서도 1952년 4월 25일에는 임기 4년의 초대 면의회의원의 선거가 있었다.   한편 휴전회담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6월 23일에는 한만국경의 수풍발전소를 폭격했고 9월 12일에는 역시 한만국경인 회령(會寧)을 폭격했다.   1953년 6월 11일에는 북진통일 전국대회가 있었고 6월 18일에는 반공포로 2만5천명을 전원 석방하였으며 7월 16일에는 이날을 기해 국군은 전전선에서 반격전을 전개했고 7월 21일에는 드디어 금성삼각지(金城三角地)를 탈환했는데 7월 27일에는 휴전회담이 조인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8월 15일에는 부산에 있던 정부가 환도했고 8월 16일에는 국회마져 환도했다.   1954년에는 본 면사무소의 청사를 중건했다. 본 면의 청사는 본래 1928년에 신축했던 것인데 앞서 6.25사변 때 소실되어 그 동안 완사(浣沙)에 임시사무소를 가설(假設)하고 면행정을 수행해 왔었다.   1955년에는 서울의 피난학교이던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가 서울로 되돌아 갔다. 그런데 이 동흥중학교는 6.25사변으로 1951년부터 본 면의 다솔사 대양루(多率寺大陽樓)에서 운영되어 왔었다.   1956년 8월 8일에는 시.읍.면장(市邑面長)을 직선제(直選制)로 개정(1956. 2. 13字)됨에 따라 제2대 시.읍.면의회의원(市邑面議會議員) 및 시.읍.면장의 선거가 동시에 있었다.   이에 앞서 곤명면의회(昆明面議會)는 곤명면리동조례(昆明面里洞條例)로서 곤명면(昆明面)의 관할 행정부락(行政部落)을 27개 리동(里洞)으로 확정한바 있었다.   곤명면의 27리동(里洞)   오사(梧沙) 추동(楸洞) 신산(新山) 용산(龍山) 조장(助場)   오저(梧苧) 원전(院田) 초량(草梁) 삼정(三亭) 옥동(玉洞)   은사(隱士) 마곡(麻谷) 송림(松林) 성방(城方) 구몰(龜沒)   작팔(作八) 만지(滿地) 고월(顧月) 정곡(正谷) 완사(浣沙)   신기(新基) 본촌(本村) 두인(斗印) 금성(金城) 장신(長新)   연평(蓮坪) 연행(蓮香)   1958년 12월 26일에는 시.읍.면장의 직선제를 임명제(任命制)로 고쳤다가 1960년 11월 1일에는 각급 지방자치단체장(各級地方自治團體長) 및 동리장(洞里長)을 임기 4년의 직선제로 개정하여 12월 19일에는 제3대 시읍 면의회의원의 선거를 실시했고 12월 26일에는 시.읍.면장의 선거를 실시했으며 12월 26일에는 시.읍 면장의 선거를 실시(제2차) 하였는데 9개월 후인 1961년 9월 1일에는 읍면자치제(邑面自治制)를 폐지하고 군(郡)을 최하위(最下位) 자치단체로 고쳤다.   한편 이에 앞선 1960년에는 봉계초등학교(鳳溪國民學校)가 개교되었었다.

  1962년 1월 1일에는 년호(年號)를 단기(檀紀)에서 서기(西紀)로 변경했고 1월 13일에는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성안되어 조국은 이로부터 근대화(近代化)되기 시작했다.   아울러 이 해(1962)에는 곤명우체국(昆明郵遞局)과 곤명면보건진료소(昆明面保健診療所)가 개설되고 1963년에는 곤명고등공민학교(昆明高等公民學校 : 設立者 姜渭鐵)가 설립되었으며 1965년에는 농촌지도소곤명지소(農村指導所昆明支所)가 개소되었고 1966년에는 연세학원(延世學園)에 의하여 곤명중학교(昆明中學校 : 設立者 延學祥)가 설립되었다.   1967년에는 남강 땜 건설공사로 37.5m 선인 연평리(蓮坪里), 정곡리(正谷里), 신흥리(新興里), 금성리(金城里) 등지의 경지면적 170정보가 수몰되어 진양호(晋陽湖)로 편입되었다. 그런데 이 진양호는 다목적(多目的) 땜으로 이는 1969년 10월 7일에 준공되었었다.   1968년 2월 7일에는 경전선(慶全線) 진주~순천간 80.5km의 개통으로 완사역(浣沙驛)과 다솔사역(多率寺驛)이 개설되고 4월 1일에는 [내 향토는 내가 지킨다]는 향토방위의 숭고한 이념아래 곤명예비군중대(昆明豫備軍中隊)와 완사예비군중대(浣沙豫備軍中隊) 등 향토예비군(鄕土豫備軍)이 창설되었다.   1972년 4월 11일에는 지난 1970년부터 시작된 새마을운동의 일환으로 72년도 새마을운동 계획안을 채택하고 전국 16,602개 리동에 107억원이 지원되었다. 이때 본면에서도 마을회관건립 또는 보수를 비롯하여 농촌 지붕개량 골목길 넓히기 농로개설 등 이로부터 새마을운동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였으며 12월 15일에는 임기 6년의 통일주체국민회의(統一主體國民會議) 대의원(代議員) 선거가 있었다.   1975년 7월 8일에는 민방위법(民防衛法)의 국회통과로 민방위대(民防衛隊)가 창설되었고 1978년 5월 18일에는 제2대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선거가 있었으며 1980년에는 완사지역(浣沙地域)에 상수도(上水道)가 시설되었다.   1981년 2월 11일에는 대통령선거인(大統領選擧人) 선거가 있었고 1982년에는 앞서 설치되었던 곤명예비군중대와 완사예비군중대가 통합되어 예비군공명면대(豫備軍昆明面隊)가 발족되었었다.   1983년에는 원전보건진료소(院田保健診療所)가 개소되고 1985년에는 은사보건진료소(隱士保健診療所)가 개소되었으며 또 곤명복지회관(昆明福祉會館)이 건립되었는데 이는 2층 120평 규모의 건물로서 이에는 예식장(禮式場)과 회의실(會議室) 그리고 경노당(敬老堂)이 수용되어 있다.   또 이해(1985)에 남강땜 관리사무소에서는 38.5m선까지 보상지구로 책정함에 따라 5정보가 추가로 수몰되었다. 그리하여 정곡(正谷) 마을 전부가 철거케 되어 곤명중학교 앞 6,000평의 농지를 매립, 전 72호 중 27호는 다른 지역으로 전출하고 45호는 집단 이주하였다.   뿐만 아니라 남강땜 관리사무소에서는 상하지구(上下地區)의 수위조절이 불가피하다 하여 44.5m선까지 재조정을 또 추진중에 있다. 이에 만약 이 안에 실현된다면 정곡리(正谷里 : 正谷, 浣沙, 新基), 신흥리(新興里 : 顧月, 滿地), 금성리(金城里 : 金城, 斗印, 長新), 본촌리(本村里 : 本村), 작팔리(作八, 龜沒) 등 11개 부락이 또 수몰지구로 편입될 전망이다.

  參 考 文 獻   1. 三國史記 : 金富軾   2. 三國遺事 : 一 然   3. 三國志魏志 : 陳壽   4. 後漢書 : 笵曄   5. 日本書記 : 岩波書店刊行   6. 全國文化遺蹟總攬 : 文化財管理局   7. 韓國考古學地圖 : 韓國考古學硏究會   8. 朝鮮古蹟圖譜 : 朝鮮總督府   9. 韓國考古學槪說 : 金元龍   10. 高麗史 : 鄭麟趾, 金宗瑞   11. 高麗史節要 : 民族文化推進會   12. 朝鮮王朝實錄 : 國史編纂委員會   13. 高宗純宗實錄 : 國史編纂委員會   14. 慶尙道地理志: 佛咸文化社   15. 世宗實錄地理志 : 世宗大王紀念事業會   16. 新增東國輿地勝覽 : 盧思愼   17. 東國輿地志 : 亞細亞文化社   18. 輿地圖書 : 國史編纂委員會   19. 大東地志 : 金正浩   20. 經國大典 : 崔恒, 盧思愼   21. 大典會通 : 趙斗淳   22. 磻溪隧錄 : 柳馨遠   23. 東國地理誌 : 韓百謙   24. 東史綱目 : 安鼎福   25. 晋陽誌 : 成汝信   26. 晋州牧邑誌 : 亞細亞文化社   27. 增補文獻備考 : 洪鳳漢   28. 舊韓國官報 : 舊韓國政府官報局   29. 統監府公報 : 統監府   30.朝鮮總督府官報 : 朝鮮總督府   31. 慶尙南道誌 ( 2種 ) : 慶尙南道   32. 한국사 : 國史編纂委員會   33. 韓國史 : 震壇學會   34. 韓國史講座 : 一潮閣   35. 韓國古代史硏究 : 李丙燾   36.韓國地方行政史 : 內務部   37. 朝鮮王朝行政史 : 金雲泰   38. 釜山慶南三一運動史 : 三一同志會   39. 韓國戰爭史 : 陸軍士官學校   40. 國難史槪觀 : 金鍾權   41. 晋州大觀 : 勝田伊助   42. 甲午東學革命史 : 崔玄植   43. 韓國警察史 : 內務部治安局   44. 高等警察關係摘錄:慶尙南道警察部   45. 朝鮮年監 13 卷 (日政時) :京城日報社   46. 朝鮮年監 (美軍政時) : 朝鮮通信社   47. 韓國村落社會史硏究 : 高承濟   48. 朝鮮還輿勝覽 : 李秉延   49. 韓國地名沿革考 : 權相老   50. 한국지명총람 : 한국학회   51. 泗川의片貌 : 崔永俊   52. 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 : 朝鮮總督府   53. 朝鮮全道府郡面里名稱一覽 : 越智唯七   54. 全國地方行政要覽 : 內務部   55. 河東郡史 : 余宰奎   56. 내 고장의 傳統 : 晋州市   57. 내 고장의 傳統 : 河東郡   58. 내 고장의 傳統 : 泗川郡   59. 南海의 얼 : 南海郡   60. 慶南의 脈 : 慶南新聞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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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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