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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명면지

9. 일제강점시대(日帝强占時代)   융희4년(1910) 8월 29일에는 국치에 이어 결국 일제로부터 강점을 당했다. 그리하여 이로부터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의 전개기로 발전했다.   한편 일제는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조선(朝鮮)으로 개칭하고 통감부 대신 강력한 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를 설치했다.   그리고 도의 관찰사(觀察使)를 도장관(道長官)으로 하여 이를 칙임(勅任)으로 하고 부 군(府郡)의 부윤(府尹)과 군수(郡守)는 주임(奏任)으로 하며 면(面)의 면장(面長)은 판임(判任)으로 하는 지방관제(地方官制)를 공포했다.   그리하여 종래의 전국 317군의 군수와 4,351면의 면장은 하급기관으로서 지방행정을 다스리게 했다.   이 무렵 진주에서 발간된 경남일보(慶南日報)는 10월 11일자 제184호에 일본인 도장관의 부임기사를 실으면서 그 상단에 황철(黃轍) 관찰사의 전별 사설을 실었다. 그리고 1면에는 일제의 강점에 항의하여 순절한 매천(梅泉) 황현(黃玹)의 절명시(絶命時)를 게재했는데 이로 인해 신문은 압수되고 10월 14일부터 정간처분 되었다가 10월 25일에 복간되었으나 그 후 1914년에 결국 폐간되고 말았다.   1914년 3월에는 부령 제111호에 의거 종래의 317군을 218군으로 4,351면을 2,517면으로 하는 군면의 폐합이 있었다.   이로 인해 종전 10면 85동리를 소관했던 곤양군은 그 관할구역을 사천군과 하동군에 분할 이속하고 종말을 고했다.   그런데 이 곤양군은 본래 포촌현(浦村縣)이던 것을 신라 경덕왕16년(757) 이래로 하읍현(河邑縣), 곤명현(昆明縣), 곤남군(昆南郡), 곤양군(昆陽郡) 등으로 1,157년 동안 지방행정조직의 하급기관으로 이어져 왔던 것이다.   이에 그 관할구역의 이속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 곤양군의 방면(坊面)   동부면(東部面), 가리면(加利面) → 사천군으로 이속되고 2면이 합해져 곤양면(昆陽面)이 됨   서부면(西部面), 양포면(兩浦面) → 사천군으로 이속되고 2면이 합해져 서포면(西浦面)이 됨   금양면(金陽面), 서 면(西 面) → 하동군으로 이속되어 금양면  (金陽面:辰橋面)과 남면(南面 : 金南面이 됨   초량면(草梁面), 소곡면(所谷面), 성방면(城方面), 곤명면(昆  明面) → 사천군으로 이속되고 4개면이 합해져 곤명  면(昆明面)이 됨   나. 신규편입(新規編入)   진주군축곡면연행동(晋州郡杻谷面蓮香洞)이 본 면으로 편입되어 조평동(助坪洞)과 합해져 연평리(蓮坪里)가 되었다.   다. 폐합후의 곤명면 속리(屬里)   연평리(蓮坪里), 금성리(金城里), 본촌리(本村里), 정곡리(正谷里)   삼정리(三亭里), 은사리(隱士里), 마곡리(麻谷里), 송림리(松林里)   초량리(草梁里), 봉계리(鳳溪里), 용산리(龍山里), 조장리(助場里)   추천리(楸川里), 신흥리(新興里), 작팔리(作八里), 성방리(城方里)

  1915년 3월 20일에는 민적법(民籍法)을 개정하여 호적사무를 면장에게 이양했고 1916년 1월 24일에는 호구조사(戶口調査) 규정을 공포하였으며 1917년 6월에는 면제(面制)를 공포하고 면은 교육사무를 제외한 관내의 공공사무를 처리하며 면에 특별부과금과 수수료 사용료 등의 징수권을 부여했다.   1918년에는 본 면의 봉계리(鳳溪里)의 사천경찰서 곤명경찰관주재소(泗川警察署昆明警察官駐在所)가 설치되고 종전의 헌병분견소(憲兵分遣所)는 철수되었다.   조국(祖國)이 일본제국주의로부터 강점(强占)되기 10년이 되려는 1919년 3월 1일, 경성(京城 : 서울)의 태화관(泰和館)에서는 민족대표 33인에 의하여 독립선언(獨立宣言)이 있었고 파고다공원에서는 독립요구의 시위가 계속됐었다.   특히 3월 3일에 있은 광무제(光武帝 : 高宗皇帝)의 국장(國葬)을 계기하여 거족적인 민족운동은 전국 방방곡곡(坊坊曲曲)에서 일어났다.   3월 18일에 시작한 진주의 시위는 21일까지 이어졌고 사천에서는 3월 21일에 있은 사천공립보통학교 졸업식을 계기하여 온 거리는 태극기와 함성의 물결로 화해버렸다.   4월 5일에는 본 면의 금성리(金城里)에서 독립만세의 시위가 있었고 4월 15일에는 삼정리(三亭里)의 오사재(五思齋)에서 훈장 정부와(鄭復窩)의 주도로 만세시위가 있었으며 4월 17일에는 옥녀봉상(玉女峰上)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는데 이때 일제의 고등경찰(경상남도경찰부)이 기록한 [고등경찰적록(高等警察摘錄)]에 의하면 [곤명면연평리(昆明面蓮坪里)의 김경찬(金敬贊) 등이 수모자(首謀者)가 되어 부락민을 선동하고 4월 17일 옥녀봉상(玉女峰上)에 지(至)하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高唱), 시위운동을 전개하려고 하였으므로 사천헌병대에서 수모자를 검거하고 진무(鎭撫) 하였다]라고 했다.   이러한 민족운동은 곤양면(昆陽面)에도 이어져 4월 5일과 4월 19일에는 보통학교 생도와 곤양시장의 군중들이 일어 났었는데 이의 사실도 일제의 [고등경찰적록]에 수록되어 있다.   한편 중국으로 망명한 민족운동자 30여명은 4월 10일에 상해(上海) 불조계(佛祖界)의 금문신로(金文神路)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수립했고 4월 14일에는 미국의 교포들이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를 개최하고 대한독립축하행진(大韓獨立祝賀行進)을 가졌다.

  1920년 7월에는 면장(面長)의 자문기관으로 면협의회(面協議會)를 신설하고 의장(議長)인 면장 이외에 8인 이상 14인 이내의 협의회원(協議會員)을 두는 면제(面制) 개정이 있었다.   이 협의회의 회원은 지정면(指定面 : 뒤에 邑으로 昇格된 面)의 경우 면의 부과금 년액(年額) 5원이상의 납부자이어야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부여했고 보통면의 경우에는 선거에 의하지 아니하고 군수가 임명하였는데 이는 임기 3년의 명예직이었다. 한편 이때의 본 면은 보통면으로서 이 협의회의 회원은 군수가 임명한 8명이었다.   1924년에는 곤명공립보통학교(昆明公立普通學校)가 개교되었다. 이때의 학교 설립에 대하여는 한국내의 일본인 교육을 처리하기 위해 설치된 학교조합(學校組合)과 한국인 교육을 처리하기 위해 설치된 학교비제도(學校費制度)가 있었다.   이 중 공립보통학교의 설립은 1919년의 3개면 1개교 증설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1925년 4월 1일에는 경상남도의 도청을 진주에서 부산으로 옮겨갔고 그 이듬해(1226)의 1월 6일에는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의 청사(廳舍 : 前中央廳)가 완공 되었다.   1926년 6월 10일에는 순종의 국장일(國葬日)을 계기하여 청년학생들이 인쇄물을 뿌리고 독립만세를 고창(高唱)한 이른바 [육십만세운동]이 일어났고 1929년 11월 3일에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었는데 이 운동은 그 이듬해(1930)의 3월까지 계속되었다.   특히 광주학생운동 때의 참가교는 전국 194개교로 54,000여명이 참가 했고 그중 투옥된 학생수는 580여명이며 무기정학 등의 처분을 받은 학생수는 2,390여명이었다.   1928년에는 정곡리(正谷里), 신흥리(新興里), 금성리(金城里), 본촌리(本村里), 연평리(蓮坪里) 등지의 몽리면적(蒙利面積) 301정보(町步)로 곤명수리조합(昆明水利組合)이 인가되었다. 그리고 그 뒤인 1943년에는 추천리(楸川里), 조장리(助場里) 등지의 몽리면적 134정보로 용산수리조합(龍山水利組合)이 인가된 바 있다.   1930년 12월 1일에는 각 면에 법인격(法人格)을 부여하고 자문기관이던 면협의회(面協議會)를 의결기관으로 하는 지방행정제도의 개혁이 있었다.   이러한 개혁은 지방행정의 자치제실시에 따른 것인데 이때는 앞서 지정면(指定面) 경우의 예와 같이 면의 부과금 년액 5원이상의 납부자이어야만 선거권과 피선거권이 부여되었었다.   그리하여 1931년 5월 21일에는 임기 4년의 명예직인 제1회 협의회원(協議會員)의 선거가 있었고 1935년 5월 2일에는 제2회 선거가 있었으며 1939년 5월에는 제3회 선거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는 1943년과 1944년 등 2회에 걸쳐 각 1년씩 그 임기를 연장했을 뿐 더한 선거는 없었다.   한편 이에 앞서 1933년에는 한용운(韓龍雲)이 이끈 불교계통의 항일단체인 만당(卍黨)의 비밀결사본부(秘密結社本部)를 본 면내 다솔사(多率寺)로 옮겨 김범부(金凡夫), 김법린(金法麟), 최범술(崔凡述) 등과 더불어 민족운동을 전개했었다.   1939년 7월 3일에는 각 면에 이르기까지 경방단(警防團)을 조직하여 경찰보조기관으로 활용했고 10월 1일에는 국민징용제(國民徵用制)를 실시했는데 이로부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45만 명을 동원해 갔다.   1940년 2월 11일부터는 전국민에 대하여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기 시작했고 10월 16일에는 조선정신동원연맹(朝鮮精神動員聯盟)을 국민총력연맹(國民總力聯盟)으로 개편하여 황국신민화운동(皇國臣民化運動)의 강행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결성된 본면의 총력연맹 31개 부락은 다음과 같다.   오사(梧沙), 추동(楸洞), 신산(新山), 조장(助場), 평촌(坪村)   용산(龍山), 오저(梧苧), 원전(院田), 초량(草梁), 삼정(三亭)   옥동(玉洞), 은사(隱士), 마곡(麻谷), 금막(金幕), 송림(松林)   송남(松南), 성방(城方), 구몰(龜沒), 매화(梅花), 작팔(作八)   만지(滿地), 고월(顧月), 완사(浣紗), 신기(新基), 곡내(谷內)   본촌(本村), 양월(陽月), 두인(斗印), 금성(金城), 장신(長新)   연평(蓮坪)   이와같이 국민총력연맹을 결성한 일본제국주의는 농산물 공출제도를 1941년에 강제로 시행하더니 12월 8일에는 진주만(眞珠灣)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을 일으켰다. 그러자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는 그 이튼날인 12월 9일에 대일 선전포고를 발표하고는 광복군으로 하여금 연합군과 연합하여 대일전(對日戰)에 참전토록 했다.

  1942년 1월 14일에는 조선군사령(朝鮮軍事令)을 공포하고 4월 7일에는 육군 특별지원병 검사를 시작하였으며 11월 20일에는 조선징병제도 실시요강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1943년 3월 1일에는 징병제(徵兵制)를 공포하였으며 10월 20일에는 한국학생의 징집유예를 폐지함과 동시에 이른바 학병제(學兵制)를 실시 했다.   이때 본 면에서는 지원병이라는 미명 아래 3명의 청년이 징집되어 갔으나 금성리(金城里)의 문수열(文洙烈)은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리하여 그는 광복군(光復軍)에 편입되어 대일 실전에 참가하기도 했었다.   한편 일본제국주의는 1944년 2월 8일부터 징용제(徵用制)를 전면실시했고 3월 18일에는 조선총독부에 학도동원본부를 설립하였고 4월 28일에는 초등학교 4학년 이상이면 동원할 수 있는 이의 규정을 공포하고는 7월 1일부터 1개월 동안에 무려 145,644명을 동원해 갔다.   그리고 6월 3일에는 미곡 강제공출제(米穀强制供出制)를 실시하더니 급기야는 각 가정의 식기, 대접, 수저 등 놋쇠는 물론 하물며 교량의 난간 쇠붙이 등을 있는대로 뜯어갔다.   뿐만 아니라 8월 23일에는 여자정신대근무령(女子挺身隊勤務令)을 공포하고 만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 없는 여성을 일본 또는 남양(南洋) 등지로 징용했다.   한편 이 해(1944)에 본 면에는 완사초등학교(浣沙國民學校)와 은사초등학교(隱士國民學校)가 개교되었다.   이에 앞서 1936년에는 금성간이학교(金城簡易學校)가 설립된바 있으나 이는 완사국민학교의 개교로 이에 통합되었고 또 이보다 더 앞서 1930년에는 봉계리(鳳溪里)에 사설(私設)의 광명학원(光明學院 : 設立者 崔凡述)이 개설된바 있고 1933년에는 다솔사(多率寺)에 불교전수학원(佛敎專修學院 : 請師 金凡夫, 金法麟, 崔凡述)이 개설된 바도 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1943년 1월 27일에는 미(美), 영(英), 중(中) 등 3개국에 의하여 [한국 인민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자유독립할 것]이라는 이른바 [카이로 선언]이 있었고 1945년 7월 26일에는 이 카이로 선언의 이행을 확인하는 [포츠담 선언]이 있었다.   이에 앞서 미국은 7월 16일에 최초의 원자탄 폭발실험을 하더니 8월 6일 일본 히로시마(廣島)에 이 원자탄을 투하했다.   이러한 대 공세(大攻勢)에 몰린 일본제국주의는 8월 8일에 포츠담선언의 조건부 수락 의사를 연합군에 통고하더니 8월 15일 정오를 기해 무조건 항복하므로써 조국은 일제의 기반(羈絆)으로부터 드디어 광복(光復)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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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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