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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명면지

6. 통일신라시대(統一新羅時代)   신라는 태종무열왕7년(660)에 당군(唐軍)과 연합하여 백제를 공멸했고 또 3년 후인 문무왕 3년(663)에는 그 부흥을 꾀했던 세력마져 타멸했다.   이해 2월에 신라는 백제의 거열성(居列城 : 晋州)를 공취(攻取)하여 거열주(居列州)라고 했다. 아울러 지금의 곤명, 곤양, 서포지역은 포촌현(浦村縣 : 屈村縣)으로 계속 거열주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문왕 5년(685)에는 거열주를 발출(拔出)하여 청주(菁州 : 晋州)라고 고쳤는데 이때 포촌현(浦村縣 : 昆明, 昆陽, 西浦地域)은 한다사군(韓多沙郡 : 河東郡)에 속해진 것으로 추정된다.   경덕왕 16년(757)에는 전국의 지명을 개명하였는데 이때 청주는 강주(康州 : 晋州)로 개칭되었다.   한편 지금의 사천(泗川)은 본래 사물현(史勿縣)이던 것을 이때 사수현(泗水縣)으로 개칭되어 고성군(固城郡)에 속해졌고 포촌현(浦村縣 : 昆明)은 하읍현(河邑縣)으로 개칭되어 하동군(河東郡)에 속해졌다. 그리고 이러한 지방조직은 고려 초에 이어진다.   신라 말기에 이르러 경명왕 4년(920) 2월에 강주장군(康州將軍) 윤웅(閏雄)은 고려태조(高麗太祖)의 왕건(王建)에게 항복하였다. 그러나 강주는 이때 고려에 복속되지 아니하고 권지강주사(權知康州事) 왕봉규(王逢規)가 독립된 세력을 이루고 있었다.   이때 왕봉규는 후당(後唐)과 외교관계를 맺었음인지 후당의 명종은 경애왕 4년(927) 1월에 그를 회화대장군(懷化大將軍)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강주지사 왕봉규는 이해 4월에 임언(林彦)을 사신으로 후당에 파견하였는데 후당의 명종은 그를 중흥전(中興殿)에서 만나 물자를 하사하고 강주의 소관인 돌산(突山 : 麗水海中島) 등 4향(鄕)을 고려에 귀속토록 했다.   한편 고려태조 왕건은 영창(英昌)과 능식(能式)으로 하여금 수군(水軍)을 이끌고 강주 등지로 나아가 남해방면의 토호세력을 위협하게 하였는데 이때 독립세력을 이루고 있던 강주지사 왕봉규는 영창과 능식에게 공략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경순왕 2년(928) 5월에 강주장군 유문(有文)이 후백제의 시조 견훤(甄萱)에게 항복하므로써 강주지역은 후백제의 세력권에 들게 되었다.   이로부터 6년 후(934) 견훤은 둘째 아들 양검(良劍)이 강주도독으로 있었는데 그 이듬해(935)의 3월에 견훤의 장남 신검(神劍)이 그의 동생 강주도독 양검과 무주도독(武州都督 : 光州) 용검(龍劍)의 승낙을 받고 정변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신검은 그의 아버지 견훤을 금구(金溝)의 금산사(金山寺)에 유배시키고 후백제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또 그 이듬해인 고려태조 19년(936)에 동생을 이끌고 왕건에게 항복하였다.   이리하여 강주(康州 : 晋州)를 중심으로한 서부경남 일원은 약 8년동안 후백제의 세력권내에 있다가 이때 고려에 병합되었다.   여기에 첨언할 것은 다솔사중건비문(多率寺重建碑文)에서 말한 즉 [왜적이 다솔사가 위치한 금성 땅을 휩쓸고 불태우다(金城地場烟乃夷騫懿厥....)라고 한 것에 연유된 신라 때 금성현(金城縣)이 있었다고 구전(口傳)되나 문헌상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어 이를 정립하지 못함이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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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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