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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명면지

5.삼국시대(三國時代)   삼국사기 신라본기의 문무왕3년(663) 2월조를 근거한 「고려사지리지」「세종실록지리지」「신증동국여지승람」「서목읍지」등에 의하면 「진주목은 본시 백제의 거열성(晋州牧本百濟居列城)」이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조 선조때의 실학자 한백렴(韓百謙)은 그의 「동국지리지」에서 「변한의 옛 땅인 경상도 서남쪽의 지리산 일대는 한때 백제가 침거했다(弁韓舊地今慶尙西南之地智異山一帶地有時爲百濟所侵據)」고 하였고 정조때의 학자 안정복(安鼎福)은 그의 「동사강목」에서 「진주는 백제의 거열성으로 신라의 서남쪽은 백제에 의해 공함되었다.(今晋州嘗爲百濟之居列城則新羅西南邑赤陷濟矣)」고 하였으며 융희 2년(1908)에 발간된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輿地考)」중 「변한국」 조와 「백제국」조에도 이와같이 이를 동일하게 인증(引證)하였고 고종 원년(1864)에 완성된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 중 「가야강역」조에는 「가야의 서남쪽은 백제에 의하여 공취되었다.(加倻之西南界百濟之所攻取)」고 했다.   이러한 맥락은 또 이어져 1963년판 「경상남도지」 중권의 「진주연혁」에는 「삼한시대에는 변한의 일성(一城)이었으나 그 후 백제에 소속되었다」고 했고 또 이의 776페지에서는 「가야지방은 우리의 기록에 의하면 그 역사가 모호하게 되어 있으나 일본 서기 등에 의하면 오래도록 백제의 겸제하(拑制下)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라고 하였으며 문교부 저작의 현행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6가야는 고대 왕국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백제와 신라에게 분활 점령되고 말았다]고 했다.

  이와같이 지금의 진주가 언제 백제에 영속되었는지 그 년대는 비록 밝혀진바 없으나 우리의 옛 국가기관에서 펴낸 지리지 또는 사료(史料)와 이 고장 선인(先人)들에 의하여 편찬된 향토지 등에 의하여 [진주목은 본시 백제의 거열성]이라고 전해져 온 것이다.   이에 부연할 것은 일조각(一潮閣) 발행의 [한국사강좌]와 경향신문사 발행의 [정책과 사상(특집 고대한일관계사연구)]에서 말한 백제 근초고왕의 남진과정, 그리고 이에 따른 일본서기상의 기록과 고구려 광개토왕의 비문 등을 원용하면 지금의 진주가 백제에 영속되기를 백제 근초고왕 24년(369)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이를 다시 부연하면 백제의 근초고왕은 마한지역이던 전남북지역과 아울러 지금의 광양(광양군지 참조)과 가야지역이던 하동(하동군사 참조), 그리고 진주지역(진주목본백제거열성)을 동시에 영속했던 것이다.   특히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백제는 무왕6년(605) 2월에 각산성(角山城)을 쌓았다고 했다. 이 각산성은 삼천포(三千浦)의 고명(古名)인데 삼국사기를 완역한바 있는 김종권(金鍾權)은 이미 진주라고 밝힌바 있다.   각산성의 성내에는 봉수(烽燧)가 있는데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각산봉수(角山烽燧)는 남쪽은 대방산봉수(臺方山烽燧 : 昌善)에 응하고 서쪽으로는 우산봉수(牛山烽燧 : 昆陽)에 응하며 북쪽은 안점봉수(鞍岾烽燧 : 泗川)에 응한다. 또 안점봉수는 남쪽은 진주각산(晋州角山 : 三千浦)에 응하고 북쪽은 망진산봉수(望晋山烽燧 : 晋州)에 응하며 우산봉수는 동쪽의 진주 각산에 응한다고 했다.   이러한 이 각산성은 백제에 의하여 축성되었고 또 이를 미루어볼 때 이는 지금의 진주지역은 이미 오랜 전부터 백제의 세력권내에 있었던 것임이 입증되고 아울러 지금의 곤명은 이 백제의 거열성에 속하여 포촌현(浦村縣)으로 불린 듯하다.   그 후 백제는 지금의 함양인 속함성(速含城)을 비롯하여 지금의 합천인 대야성(大耶城)을 공취했고 또 지금의 창원에 있는 진례성(進禮城)까지 그 세력을 넓힌바도 있다.   이와같이 지금의 진주가 백제에 영속된지 290년(추정)이 지나서 백제는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의하여 멸망(660)했다. 그러나 금강 하류로 비정되고 있는 주류성(周留城)을 비롯한 남부의 보루(堡壘)에는 그 부흥을 꾀했던 부흥군이 약3년간 진을치고 있었다.   이때 왜의 기내조(畿內朝)는 백강(白江 : 白馬江) 전투에 구원군을 파견하여 백제의 부흥군을 지원하였으나 기우러져 가는 백제의 운명을 소생시킬 수는 없었다.   이때 신라는 문무왕 3년(663) 2월에 장군 흠순(欽純)과 천존(天存)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거열성(居列城 : 晋州)을 공취하여 7백명을 참살하고 이어서 거물성(居勿城 : 光陽蟾居로 推定·李丙燾博士는 南原과 長水사이라고 하였으나 맞지 않음)과 사평성(沙平城 : 順天·李丙燾博士는 未詳이라고 했으나 각종 地理志에서 順天임을 밝히고 있음)을 공격하여 이를 항복받고 또 덕안성(德安城 : 어느 곳인지 定說이 없음. 日本書記에는 安德城, 唐은 五都督府 중 德安都督府를 두었으나 그 地名이 比定되지 않음. 李丙燾博士는 恩津의 古名인 德近郡에 比定하였으나 지금의 公州에 態津郡督府가 있었는데 그 隣接에 또 두었겠는가. 上記 4城은 모두 百濟의 南部에 있었음)을 공격하여 1,070명을 참살했다고 하였는데 일본서기에도 그 년월이 일치되는 천지2년(663) 2월조에서 [신라인이 백제의 남반사주(南畔四州)를 불태우고 점령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이의 4성은 백제의 남부에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이리하여 남부 전역에 진을 치고 있던 백제의 부흥군은 완전히 소멸됐고 아울러 거열성(居列城 : 晋州)은 이때 신라에 통합되었으며 주류성에 남아 있던 그 부흥군마져 이해 9월(삼국사기에는 일자가 없고 일본서기에는 9월 7일, 중국의 자치통감에는 9월 8일)에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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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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