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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명면지

4.가야시대(伽倻時代)   가락국(駕洛國)의 시조 수로왕(首露王)은 서기 42년 3월3일에 김해(金海)의 구지봉(龜旨峰)에 탄강(誕降)했다.   이때 변한(弁韓) 지역을 다스려 오던 9간들의 추대에 의하여 그는 가락국을 세우고 보위(寶位)에 올랐다.   또 함께 탄강한 다섯분에 대하여는 고녕가야(古寧伽倻)를 비롯하여 아라가야(阿羅伽倻 : 咸安), 대가야(大伽倻 : 高靈), 성산가야(星山伽耶 : 星山), 소가야(小伽倻 : 固城)등 5가야의 군주로 분봉하고 이들 가야연맹의 맹주로 추대되니 이의 강역(疆域)은 동쪽은 황산강(黃山江:洛東江), 서남쪽은 창해(滄海), 서북쪽은 지리산(地理山 : 智異山), 동북쪽은 가야산(伽倻山), 남쪽은 나라의 끝(國尾)으로 옛 변한(弁韓) 지역이며, 이 가야연맹의 강역을 총칭하여 또한 가락국이라고 했다.   이러한 가야연맹 중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이는 고녕가야(高寧伽倻)를 함창(咸昌)이라고 하였으나 문교부 저작의 중학교 「사회과 부도(1981년판 참조)」를 비롯한 학계 일부에서는 이 고녕가야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가야사에 대하여는 문헌적 사료의 영세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1916년에 조선총독부에 의하여 발간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의하면 진주의 수정봉 제2호 고분(水精峯第二號古墳)과 제3호 고분(水精峯第三號古墳), 그리고옥봉 제7호 고분(玉峯第七號古墳)과 그 밖의 진주 고분(晋州古墳)에서는 100여점에 이르는 도기(陶器)를 비롯하여 철기(鐵器), 큰칼(大刀), 등자(鐙子), 방추자(紡錘子), 청동경(靑銅鏡) 등 철기시대와 가야시대의 것 163점의 유물이 발굴됐었다.   그러나 이러한 귀중한 문화재는 일인(日人)의 반출로 그 일부는 동경대학(전 공과대학)에 소장되어 있고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오던 금귀걸이(金製耳飾), 은팔찌(銀製釧)를 비롯하여 굽다리뚜껑항아리(臺附有篕壺) 등 도기류(陶器類)의 일부와 그리고 사천군용현면송지리(泗川郡龍見面松旨里)의 고분에서 발굴된 굽다리단지(臺附壺) 뚜껑접시(蓋杯)등의 가야유물은 지금 국립진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사천군 용현면 송지리에서 발굴된 뚜껑 접시(蓋林)

  뿐만 아니라 본 면의 금성리(金城里)에는 가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토성(土城)으로 된 금성산성지(金城山城址)가 있고 또 1982년에 문화재관리국과 문화재연구소에 의하여 조사된 「유적조사서」에 의하면 금성리(金城里)의 고분(古墳)에서는 가야시대의 도질토기편(陶質土器片) 몇 점과 해독불명의 명문(銘文)이 있는 기와조각이 조사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최근 문화재연구소에서는 가야문화권에 들어 있는 37개 시군에 대한 1차 조사에서 2,400건의 유물을 확인하고 그 일부에 대하여는 정밀조사 까지 마쳤기 때문에 이러한 유적지표 정밀조사를 통해 고대 3국시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인 4국시대의 정립이 기대되고 있거니와 어떻든 가야연맹의 가락국은 신라와 백제의 틈바구니에서 강력한 통일국가를 이룩하지 못한 채 서쪽으로는 백제의 침략과 동쪽으로는 신라의 강세에 밀려 더 발전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가야연맹은 신라 법흥왕19년(532)에 가락국의 구형왕(仇衡王 : 一元 仇玄)이 491년간의 사직과 함께 강성(强盛)의 신라에 항복했고 또 진흥왕23년(562) 9월에는 모반하는 대가야(大伽倻 : 高靈)마져 평정되니 이로써 500년 역사의 가야연맹은 완전히 소멸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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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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