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곤명면지



곤명면지

1.서언(序言)   행정구역상(行政區域上) 경상남도 사천군 곤명면(慶尙南道泗川郡昆明面)은 지리산(智異山) 정기(精氣)가 동남쪽으로 내려 뻗은 그 기슭에 터전하고 있다.   본군(本郡 : 泗川郡)의 최 서북단(最西北端)에 위치한 본면(本面 : 昆明面)은 지리산 지맥(智異山支脈)이 옥산(玉山)을 거쳐 송비산(松飛山)으로 이어진 「소실골」과 이맹산(理盲山)에서 이어져 봉명산(鳳鳴山)으로 매듭지은 「초량골」, 또한 천왕봉(天王峰) 영천(靈泉)이 덕천강(德川江)으로 이어져 완사(浣紗)들과 금성평야(禁城平野)의 충적지대(沖積地帶)를 이룩한 그 사이의 유서(由緖)깊은 땅이다.   동쪽으로 진양군나동면(晋陽郡奈洞面)과 인접하고 동북쪽과 북쪽은 대평면(大坪面)과 수곡면(水谷面)에 인접하며 서북쪽과 서쪽은 하동군(河東郡)의 옥종면(玉宗面)과 북천면(北川面)에 인접하고 동남쪽과 남쪽은 본군(本郡:泗川郡)의 곤양면(昆陽面)에 인접하고 있다.   이러한 곤명(昆明)땅에 사람이 언제부터 살기 시작했는지에 대하여는 그 상한(上限)을 알 수 없으나 본면(本面:泗川郡) 봉계리(鳳溪里)저동(苧洞)뒷 산에서 청동기시대의 돌칼(石劍)과 돌도끼(石斧)가 발굴된 적도 있고 또 금성리(金城里)에는 가야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토성(土城)으로 된 금성산성지(金城山城址)와 도질토기편(陶質土器片)등의 유물이 조사된 적도 있으며 아울러 옛부터 웅주거목(雄州巨牧)이던 진주목(晋州牧)의 한 속현(屬縣:昆明縣)이었던 것을 살핀다면 아득한 상고시대부터 생활터전의 한 중심지 였음을 알 수 있다.   이에 이러한 수천년 역사를 그 주변의 내력과 아울러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에 앞서 먼저 곤명(昆明)의 칭호유래(稱號由來)를 밝힌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곤양군조(昆陽郡條)에 의하면 곤양군은 「본래 고려의 곤명현(昆明縣)이다. 신라 때의 칭호는 자세하지 못하고 현종이 진주에 예속시켰다」 昆陽郡 本高麗昆明縣新羅時稱號未詳顯宗屬晋州 以下省略

라고 했고 삼국사기 지리지(三國史記地理志)의 하동군 연혁(河東郡沿革)의 말미(末尾)에 의하면 「하읍현(河邑縣)은 본래 포촌현(浦村縣)으로 경덕왕이(하읍현이라고)이름을 고쳤는데 지금은 자세하지 못하다」 河東郡 前略 河邑縣本浦村縣景德王改名今未詳 라고 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곤양군 고적조(昆陽郡古蹟條)와 곤양군 읍지(昆陽郡邑誌)의 고적조(古蹟條)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① 옛 곤명현(古昆明縣)은 「군의 서쪽 25리에 있는데 지금은 곤명리(昆明里)로 삼았다.」 古昆明縣 在郡西二十五里今爲明里   ② 하읍폐현(河邑廢縣)은 「본래 포촌현(浦村縣)인데 신라 경덕왕이 지금 이름(河邑縣)으로 고쳐 하동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가 본조(本調)가 이곳으로 이속했다.」 河邑廢縣 本浦村縣新羅景德王改今名爲河東郡領縣本朝移屬于此 이러한 기록등을 근거하여 대동지지(大東地志)의 곤양군조(昆陽郡條)에서는 다음과 같이 정설(定設)했다.   곤양군은 「본래 신라의 포촌(浦村)인데 경덕왕 16(757)에 하읍(河邑고)이라 고쳐 하동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23년(940)에 곤명(昆明)으로 고쳤고 현종9년(1018)에 진주에 예속시켰다가 뒤에 감무(監務)를 두었다.   본조(本朝:朝陽朝) 세종원년(1419)에 어태(御胎)를 안치(安置)하므로써 남해현(南海縣)을 합쳐서 곤남군(昆南郡)으로 높였다가 19년(1437)에 다시 갈라서 남해현을 설치하고 진주의 금양부곡(金陽部曲)을 내속(來屬)시켜 곤양군(昆陽郡)으로 고쳤다.   옛 치소(治所)는 지금 치소(治所)의 서쪽 15리(25里의 誤:筆者註)에 있는데 곤명리(昆明里)라고 칭한다. 昆陽郡:本新羅浦村景德王十六年改河邑爲河東郡領縣高麗太祖二十三年改昆明顯宗九年屬晋州後置監務 本朝世宗元年安御胎以南海縣合陞昆南郡十八年復析置南海以晋州之金陽部曲來屬改昆陽郡 舊治在今治西十五里秤昆明里 즉 신라 때의 처음 칭호인 포촌(浦村)과 경덕왕이 개칭한 하읍(河邑)은 지금의 곤명면(昆明面), 곤양면(昆陽面), 서포면(西浦面) 일대를 총칭한 것이고 고려태조가 개칭한 곤명(昆明)도 이 일대를 총칭한 것이다.

  그리고 금양부곡(金陽部曲)은 지금의 하동군금남면(河東郡金南面)전 지역(全地域)과 진교면(辰穚面) 고룡리(古龍里)와 양포리(良浦里), 안심리(安心里)가 곧 그곳인데 이 곳은 1914년에 하동군으로 이속되기 이전에는 곤양군의 서면(西面 : 金南面)과 금양면(金陽面 : 唇僑面)이었다.   또 곤명현(昆明縣)때의 치소(治所)는 지금의 곤명면에 있었다는 뜻이고 아울러 당시의 치소(治所)가 지금의 곤명면에 있었기 때문에 곤명이라는 칭호는 그대로 전해지게 된 것이며 지금의 곤양(昆陽)은 조선조 세종19년(1437)에 당시의 칭호인 곤명(昆明)에 금양부곡(金陽部曲)을 합친 칭호이고 서포(西浦)는 구한말(舊韓末) 이전의 칭호인 서부면(西部面)과 양포면(兩浦面)을 합친 칭호인데 이의 폐합은 1914년에 있었다.   그리고 삼국사기지리지의 강주조(康州條:晋州)를 보면 이의 속현(屬縣)두 곳 중, 한곳은 가수현(嘉樹縣)으로 이는 지금의 삼가면(三嘉面)이고 「굴촌현」은 지금 자세하지 못하다.(屈村縣今未洋)라고 했는데 이는 지리적 여건으로 보아 이 굴촌현(屈村縣)은 곧 포촌현(浦村縣)으로 지금의 곤명면(昆明面) 곤양면(昆陽面).서포면(西浦面)등지를 말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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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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