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1章 昆明面建置沿革
시대 | 명칭 | 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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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 본면(本面)의 남쪽에 위치한 서포면 구평리(西浦面舊坪里)에서는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의 유물(遺物)이 발굴된 적이 있고 또 본 면의 봉계리(鳳溪里) 저동(苧洞) 후산(後山)과 본면의 동북쪽인 진양군 대평면 대평리(晋陽郡大坪面大坪里)의 옥방1호 주거유적지(玉房1號住居遺蹟址)에선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의 유물이 발굴된 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고장은 기원전 약 2천년경 이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 |
삼한시대 (BC.2세기경) | 군미국 | 삼한(三韓: 馬韓, 辰韓, 弁韓) 중 변한(弁韓)에 속하고 그 12국 중의 하나인 군미국(軍彌國)으로 추정되고 있다. |
가야시대 (AD. 42) | 고녕가야 | 가락국(駕洛國)의 가야연맹(伽耶聯盟) 중 고녕가야(古寧伽耶 : 晋州)에 속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
삼국시대 | 포촌현 | 가락국의 구형왕(仇衡王)이 신라에 항복(532) 하기에 앞서 백제는 지금의 진주지역을 취하여 거열성(居列城)이라고 했다. 그리고 지금의 곤명(昆明), 곤양(昆陽), 서포(西浦)지역은 포촌현(浦村縣)으로 이 곳은 거열성에 속해 있었다. |
통일신라시대 (663) | 신라는 문무왕 3년에 백제의 거열성(居列城 : 晋州)을 공취(攻取)하여 거열주(居列州)라 하였다. 아울러 이 때에도 포촌현(浦村縣 : 屈村縣?)은 이 거열주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
(685) | 한다사군 포촌현 | 신문왕 5년에는 거열주를 청주(菁州 : 晋州)라 개칭 하였는데 이때 포촌현은 한다사군(韓多沙郡 : 河東郡)에 속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757) | 하동군 하읍현 | 경덕왕 16년에는 청주를 강주(康州 : 晋州)로 한다사군은 하동군(河東郡)으로 개칭 되었는데 아울러 포촌현은 하읍현(河邑縣)으로 개칭되어 하동군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시대 | 명칭 | 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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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940) | 하동군 곤명현 | 고려 태조 23년에 강주를 진주(晋州)로 개칭할 때 하읍현은 곤명현(昆明縣)으로 개칭되어 계속 하동군에 속해 있었다. |
(1018) | 진주목 곤명현 | 현종 9년에 곤명현은 진주목(晋州牧)의 속현으로 이속되었다. |
조선시대 (1419) | 곤남군 | 세종 1년에 곤명현은 남해현(南海縣)을 합쳐서 곤남군(昆南郡)으로 승격되었다. |
(1437) | 곤양군 곤명리 | 세종 19년에는 곤남군에서 남해현을 분리하고 진주의 금양부곡(金陽部曲)을 내속시켜 곤양군(昆陽郡)으로 개칭되었다. 그리하여 지금의 곤명면은 곤양군 곤명리(昆陽郡 昆明里)가 되었다. |
(1675) | 초량면, 소곡면, 성방면, 곤명면 | 숙종 1년에는 오가통사목(五家統事目)에 의하여 곧 명리는 초량면(草梁面), 소곡면(所谷面), 성방면(城方面), 곤명면(昆明面) 등 4개면으로 구분되고 계속 곤양군에 속해 있었다. |
(1895) | 고종 32년에는 8도제를 폐지하고 23부제를 시행하면서 곤양군은 사천군(泗川郡)에 편입되었다가 곧 이어 곤양군으로 환원되었다. | |
일제강점시대 (1914) | 사천군 곤명면 | 지방행정구역 개편으로 곤양군은 그 관할구역10개 면을 사천군(泗川郡)과 하동군(河東郡)에 분할 이속하고 해체되었다. 이때 초량 소곡 성방 곤명 등 4개면은 합해져 곤명면(昆明面)이 되고 행정16개리를 소관했다. 하편 진주군 축곡면 연행동(蓮香洞)이 본 면으로 편입되어 조평동(助坪洞)과 합해져 연평리(蓮坪里)가 되었다. |
대한민국시대 (1956) | 읍면 자치제의 시행으로 곤명면은 법정 16개리를 행정 27개리로 분리 소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