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곤명면지



곤명면지

4. 이후림(李厚林)   본관(本貫)은 전주인(全州人)으로 자(字)는 경신(敬新) 혹은 균옥(均玉)이며 호(號)는 유암(有菴)이다. 구한말(舊韓末) 망국(亡國)의 풍운(風雲)이 감돌던 1893년, 서포면금진리(西浦面金津里)에서 출생(出生)하였고 7세부터 칠서수학(七書修學)에 들어갔다 한다. 그는 20세에 이르자 멀리 전남(全南) 계화도(界火島)로 당시의 거유(巨儒) 간재(艮齊) 전우(田愚) 선생을 찾아가 집지(執摯)하였다.   良齊先生은 1913년 서북간도(西北間道) 독립단사건(獨立團事件) 으로 지사(志士) 105인(人)이 검거 (檢擧)되었는데 이를 계기(契機)로 하여 일본경찰은 민족운동진원(民族運動振源)이 유림(儒林)에 있다 보고 탄압(彈壓)이 극심(極甚)하니 당시 태학관(太學館) 제주(祭圭) (유학자의 최고직)였던 전우(田愚)는 계화도(界火島)에 은거(隱居)하였던 것이다.   계화도(界火島)에 간 유암(有菴)은 여기에서 많은 지사(志士) 선비들과 교류(交流)하며 경서(經書)와 성리학(性理學) 그리고 민족사상(民族思想) 교육(敎育)을 뿌리 깊게 받았다는 것이다.   1918년 사천군 서포면(西浦面) 자혜리(自惠里)에 학당(學堂)을 세위 주체의식(主體意識)을 대의(大義)로 하여 학동(學童)에게 가르치니 그 수(數)가 동면 소재지 구평(舊坪)에 있는 일본인이 세운 개화학교(開化學校)의 학생수 보다 많음으로 일본인 헌병(憲兵)이 찾아와 회유(懷柔)와 협박(脅迫)으로 개화(開化)학교 교사(敎師) 취임(就任)을 요구(要求)받았으나 이에 굽히지 아니하니 드디어 학당(學堂)이 강제(强制) 해산(解散)을 당하게 되었다.   이 소식(消息)을 들은 하동군 진교면 고이리(古梨里)의 재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 강달수(姜達秀)씨 부친이 유암(有菴)을 초빙(招聘)하여 학당(學堂)을 개설(開設)한바 여기에도 일본헌병(憲兵)의 눈을 피(避)할수 없어 그만 두고 감시(監視)가 덜한 외딴곳 다솔사(多率寺) 남쪽 기슭의 관곡(冠谷)에 서당(書堂)을 신축(新築)하여 후학(後學)을 길렀으니 이곳에도 일본 경찰의 눈초리는 파급(波及)되어 여기 또한 있을수 없게되어 와룡산(臥龍山) 밑 용산정(龍山亭)에서 김수학(金洙學)氏의 父親, 金楨鎬氏의 주선(周旋)으로 은거(隱居)하였다.   이즈음 독립운동(獨立運動)은 활발(活潑)해져서 영남(嶺南)에서의 광복단사건(光復團事件), 상해군자금사건(上海軍資金事件) 기호(畿湖)의 국권회복단사건(國權恢復團事件) 등이 연달아 터졌고 이어서 영남(嶺南) 유학자(儒學者) 곽종석(郭鍾錫)의 파리(巴里) 장서사건(長書事件)이 터지니 유학자(儒學者)에 대한 박해(迫害)는 더욱 심(甚)하여 유암(有菴)에게도 예외없이 화(禍)가 미쳐서 본가(本家)를 수색중(搜索中) 제자 강달수(姜達秀)에게 보내는 백이숙제(伯夷叔齊)의 교훈내용(敎訓內容)의 서한(書翰) 이 꼬투리가 잡혀 부인(夫人)은 고문(拷問)으로 이막(耳膜)이 파열(破裂) 되었는데 이로 인(因)하여 형독(刑毒)으로 졸(卒)하였다.   유암(有菴)은 자신(自身)으로 인한 가족(家族)의 화(禍)를 더 이상(以上) 견딜수 없어 자진(自進) 사천경찰서(泗川警察署)에 출두(出頭)하니 일경(一警)이 취조(取調)에 앞서 단발령(斷髮令) 위반(違反)부터 다스린다고 가위로 상투를 짜르려 하였다. 이때에 유암(有菴)은 [너희들의 더러운 손에 내몸을 굽힐까 보냐]하고 날 세게 소지(所持)한 장도(掌刀)를 꺼내어 자신(自身)의 목을 찔러 유혈(流血)이 난장판이 되니 일경들은 황급(惶急)히 병원(황순주[黃順柱]병원)에 옮겨 치료(治療)하여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병원장 황순주(黃順柱) 또한 민족주의자(民族主義者)인지라 서장(署長)에게 말하기를 [선비가 보발(保髮)하는 것은 효(孝)와 지조(志操)의 상징(象徵)인데 강행(强行)하게 되면 자결(自決)할 것이니 방면(放免)함이 현책(賢策)]이라 하니 서장(署長)은 이 안(安)을 받아들여 옮게 여겨 계획(計劃)하였던 간재(艮齊) 문인(門人) 음모사건(陰謀事件) 조사(調査)를 포기(抛棄)하고 석방(釋放)하였다.   떠나올때 이 사항(事項)을 들은 일본인 서장(署長) 처(妻)가 고결(高潔)한 지사(志士)의 모습을 봐야겠다고 신을 벗은채 뛰어 나오는 광경(光景)을 그때 차(車)를 운전하던 기사 곤명출신인 김대영(金大榮)氏가 증언(證言)한 바 있다. 후일 은구재(隱求齊)를 지을적에 이것이 인연(因緣)이 되어 김대영(金大榮)氏의 협조(協助)가 컸었다.   전쟁말기(戰爭末期) 일제(日帝)의 가혹(苛酷)한 사슬에 졸리어 견딜수 없어 가족(家族)과 함께 지리산(智異山) 운봉(雲峰)면 내리(內里)의 화전민촌(火田民村) 에 피신(避身)하여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생(生)을 잇다가 해방(解放)이 되자 은사동(隱士洞)에 귀향(歸鄕)하여 後學을 지도하다가 사우(士友)와 제자(弟子)들의 도움으로 이이당(二以堂)과 은구재(隱求齋)를 세워 강회(講會)와 계회(稧會)를 열어 위기위인(爲己爲人)의 학풍(學風)을 일으켰다.   이이당(二以堂)이라 함은 論語에 [이문회우(以文會友) 이우보인(以友輔人)]의 뜻에서 취한 것이다.   의사(義士) 최익현(崔益鉉)과도 교신(交信)이 있었으며 사우(士友)로는 문영빈(文永斌) 민영복(閔泳馥) 권창현(權昌鉉) 하순봉(河恂鳳) 정용강(鄭龍岡) 등등이 있고 그의 강론(講論)과 문집(文集)등은 유암사교(有菴私稿)에 기록(記錄)되어 있다.   (有菴私矯에서 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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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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