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곤명면지



곤명면지

8. 이기호(李箕鎬) 처(妻)   김해김씨(金海金氏) 효열비명(孝烈碑銘)   주역(周易)의 항괘(恒卦)의 六五효사(爻辭)에 이르기를 부인(婦人)은 항구(恒久)한 덕(德)을 세워 마음이 굳고 바르게 가짐을 좋아함은 대개 여인(女人)의 도리(道理)는 한 남편(男便)을 종신(終身)토록 섬기는 그 덕(德)을 지키고 그 절개(節介)를 변(變)치 아니한 후에야 비로소 정(貞)하고 길(吉)하다 하더니 내가 효열부(孝烈婦) 김해김씨(金海金氏)일에 그 진상(眞狀)을 보았다. 유인김씨(孺人金氏)는 관행(貫卿)이 김해(金海)니 가락국(駕洛國) 수로왕(首露王)을 시조(始祖)로 뫼시고 증조(曾祖)의 휘(諱)는 원종(元宗)이요 조부(祖父)의 휘(諱)는 창국(昌局)이요 고(考)의 휘(諱)는 명여(明汝)이니 벼슬은 정훈대부(正訓大夫) 인동도호부사(仁同都護府使)를 하시다. 비(妣)는 진양강씨(晋陽姜氏)니 유문(儒文)의 따님이시다. 유인김씨(孺人金氏)는 천품(天品)이 꼿꼿하고 착하며 일찍 가훈(家訓)을 받들어 효도(孝道)하며 공경함을 근본삼아 인의(仁義)로서 덕(德)을 닦으니 능(能)히 백사(百事)를 통한지라 나이 十六에 곤양(昆陽)고을 선비집안 강 양이공(江陽李公)기호(箕鎬)에 우귀(于歸)하다. 공(公)은 강양군(江陽君) 문충공(文忠公) 휘(諱) 개(開)의 휴예요 경상관찰사(慶尙觀察使) 휘(諱) 계경(季卿)의 十六세손(世孫)이시다.

  문벌(門閥)이 빛나고 산업(産業)이 풍요(豊饒)하여 고을에 들낼만한 집안이 되었다. 유인(孺人)이 시부모를 효도(孝道)로서 봉양(奉養)하고 부군(夫君)을 공경(恭敬)과 예의(禮義)로서 받들어 인정(人情)이 화목하며 가도(家道)가 번창함을 고을사람드과 일가 친척이 모두 그 덕(德)을 칭송(稱誦)하였다. 그 시부(媤父) 죽포공(竹圃公)의 휘(諱)는 규정(奎井)이니 성품(性品)이 엄정(嚴正)하고 문학(文學)과 행실(行實)이 세상에 널리 알려져 고을 원이 부임(赴任)하게 되면 반드시 먼저와 서 예(禮)로서 방문(訪問)하였고 도한 향교소임 (鄕校所任)을 여러 해 할재 향중(鄕中)의 대소사(大小事)와 제반경비(諸般經費)는 독담(獨擔)하였다. 그러하던중 일제(日帝)의 앞잡이들의 농간으로 군리(群吏)들의 소요(騷搖)한 일이 종종 있었고 또 갑오동란(甲午東亂)이 봉기(烽起)됨에 공(公)을 경상도주모자(慶尙道主謀者)라 하여 재산(財産)과 가산지몰(家産之物)을 전부(全部) 탈진(奪盡)당하였으며 집까지 불에 사르니 온 가족(家族)이 모두 망명도주(亡命逃走)하고 유인(孺人)이 홀로 낙후(落後)하여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외로운 몸으로 친가(親家)에 가서 조석(朝夕)으로 가족육부자(家族六父子)를 상봉(相逢)케 하여 달라고 정성을 다하여 하늘에 축원기도(祝願祈禱)하였든바 그 지극한 정성이 헛되지 아니하여 을미년(乙未年) 겨울에 경상북도상주(慶尙北道尙州)에서 천행(天幸)으로 서로 만나 두어칸 집을 마련하여 거주(居住)하고 있었으나 전국(全國)에 수배(手配)중이라 가족(家族)이 화(禍)가 두려워 바깥 출입(出入)을 못하고 유인(孺人) 스스로 양식과 땔감을 마련하여 가족(家族)들을 공양(供養)하니 그 노고(勞苦)를 어떻게 모두 말하리오 그러나 조금이라도 원성(怨聲)과 내색하는 기미가 없으니 어찌 현부(賢婦)가 아니고야 그러하랴   오래된 후에 부군(夫君)이 곤양(昆陽) 고을에 들어 왔다가 체포(逮捕)되여 혹독한 매질에 절골(折骨)이 되어 진주감옥(晋州監獄)으로 이송(移送)되었다. 이 일을 유인(孺人)이 전해 듣고 혼비낙담(魂飛落膽)하여 식음(食飮)을 전폐(全癈)하고 구출(救出)코저 하였으니 젊은 부인(婦人)의 몸으로 홀로 진주(晋州)까지 가기가 어려워 남복(男服)으로 바꾸어 입고 수일(數日) 도보(徒步) 진주영옥(晋州營獄)가지 다다러 성주(城主)께 애원호소(哀願呼訴)하여 옥중(獄中)의 부군(夫君)을 뵈오니 옥상(獄床)에 쓰러져서 인사불성(人事不省)이 되어 기지사경(旣至死境)이라 유인(孺人)이 낮에는 미음(米飮) 듸루고 밤에는 하늘에 축원(祝願)하며 지성(至誠)으로 구료(救療)한바 한달만에 정신(精神)은 조금 돌아왔으나 상처(傷處)가 성창(成瘡)이 되어 벌레가 수없이 나오는지라 옥리(獄吏)가 이를 보고 관(官)에 보고(報告)하니 드디어 석방(釋放)하거늘 유인(孺人)이 등에 업고 돌아와서 백방(百方)으로 치료(治療)하여완인(完人)이 도니 이 같은 열성(熱誠)은 옛사람 중에도 찾아 보기 드문 일이다.

  기해년(己亥年)에 부군(夫君)이 우연히 득병(得病)하여 백약(百藥)이 무효(無效)라 유인(孺人)이 문복독경(問卜讀經)은 물론 (勿論) 주야(晝夜)로 기도(祈禱)하며 손가락을 끊어 피를 뒤루웠으나 끝내 구(救)하지 못하였다. 이때 유인(孺人)의 나이 스물여섯살(26세)이다. 슬하에 선영봉사(先塋奉祀)할 자식(子息)은 없고 오직 두 딸 뿐이라 애통(哀痛)하여 기절(氣絶) 하였다가 다시 깨어나서 곧 따라 죽고져 하다가 늙으신 시부모(媤父母)를 뫼시고 봉양(奉養)할 사람이 없음을 생각하고 스스로 이르기를 내 어찌 가장(家長)을 중(重)히 여겨 노부모(老父母)를 가벼히 하리오 하고 번연히 일어나 염습 치상(致喪)을 일일이 예(禮)를 갖추어 마친후 에 삼년상(三年喪)을 피 눈물로 지내면서도 시부모(媤父母) 가 상심(傷心)할까 두려워 방성대곡(放聲大哭)은 못하였다. 경자년(更子年)에 시모상(媤母喪)을 당한 뒤에 구부(舅婦)가 서로 의지(依支)하여 길삼으로 치산(治産)하고 또 시숙희호(媤叔禧鎬)와 그의 부인(夫人) 하씨 (河氏)의 도움으로 가세(家勢)가 점점여유(漸漸餘裕)하다가 기유년(己酉年)에 또 시부상(媤父喪)을 당하매 거상(居喪)에 정성(精誠)을다 하였고 제사(祭祀)받들기와 빈객접대(賓客接待)를 극진(極盡)히 하니 이웃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 하였다. 그러나 항상(恒常) 아들 없음을 한탄(恨嘆)하여 날마다 하씨(河氏)의 생남(生男)하기를 빌었으나 하씨로부터는 늦으막에 득남(得男)함으로 이에 말숙(末叔) 태호(台鎬)에게 청하여 소생자(所生子) 원조(源祚)를 사자(嗣子)로 삼아 남사리(南沙里) 성주이씨(星州李氏) 의 문(門)에 취처(娶妻)하니 그 내외(內外)가 모두 효도(孝道)하여 편모(偏母)를 잘 봉양(奉養)하드라 유인(孺人)이 숙질(宿疾)인 가슴앓이로 여러해 신고하다가 임오(壬午) 3월 2일에 졸(卒)하니 향년(享年)이 七十이다. 처음 진양수곡면문정곡(晋陽水谷面文正谷) 뒷산에 안장(安葬)하였다가 후에 곤양면맥사리(昆陽面脉社里) 서록(西麓) 죽포공묘하(竹圃公墓下)에 이장(移葬)하다. 사남(四男)은 즉 원조(源祚)요 여장(女長)은 가(嫁) 진양강재열(晋陽姜在烈)하고 차(次)는 가(嫁) 선산김재홍(善山金在洪)하다. 손자(孫子)는 수영(壽榮) 대영(大榮) 규영(圭榮) 이요 강남(姜男)은 홍이(洪伊) 중현(重鉉) 두종(斗鍾) 사선(四銑) 이요 김남(金男)은 종권(鍾權) 종문(鍾文)이라 여(餘)는 다기록치 못한다. 아아 슬프다 주자(朱子)의 말씀에 성년고절(盛年苦節)은 사랑으로 하여금 견디기 어렵다더니 유인(孺人)이 二十六세의 청춘(靑春)으로 부군(夫君)과 사별(死別)하고 그 절개(節介)를 굳게 지켜 남편을 대신(代身)하여 시부모를 봉양(奉養)하고 조카로 남편의 후사(後嗣)를 이어 문호(門戶)를 흥황(興旺)케 이루니 주역(周易)에 운(云)한바 정(貞)하고 길(吉)함이 아니고 무엇이랴 원조(源祚)가 대로상(大路上)에 비(碑)를 세워 그 어머니의 호열(孝烈)을 표양(表揚)하여 기리 후세(後世)에 전(傳)하고져 그 족인(族人) 원대(源大)와 같이 가장(家狀)을 가지고 나에게 비문(碑文)을 청하니 또한 원조(源祚)의 극진(極盡)한 성의(誠意)가 가상(嘉尙)할 뿐 아니라 동족(同族)으로서 옳은 일을 사양(辭讓)할 수 없어 그 장문(長文)에 의(依)하여 대강 기록하고 명(銘)을 지으니 가로되   거룩하다 유인(孺人) 이여 천성(天性)이 어질도다.   시부모(媤父母)에 효도(孝道)하고 남편(男便)에게 열녀(烈女)로다.   숙수(菽水)의 치환(致歡)으로 가정(家庭)이 화목(和睦)하니   옛적 열녀(烈女) 백주(栢舟) 와 방불(彷拂)코나   아들 세워 승종(承從)하니 정(貞)하고 길(吉)하도다.   사자(嗣子)가 이 비(碑) 세워 그 효열(孝烈 ) 표양(表揚)하니   정문(旌門) 보나 못할소냐   산천(山川)은 변(變)하여도 이 비명(碑銘)은 불멸(不滅)하리   1980년 경신(庚申) 10월 18일   부족(夫族) 이상학(李相學) 찬(撰)   진양(晋陽) 하용문(河龍雯) 서(書)   외손 진양강홍이(姜洪伊)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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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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