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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명면지

2. 사천이유인(泗川李孺人) <隱士里>   정려비문(旌閭碑文)   학생(學生) 정공(鄭公) 휘(諱) 훈(熏)은 진양인(晋陽人)으로 우곡(隅谷)의 후(后)이다. 그의 배위(配位)는 유인(孺人) 사천이씨(泗川李氏)이다.   공(公)의 기계(氣槪)는 남에게 굴(屈)하지 않고 고상 하였으며 풍모(風貌)와 의용(儀容)이 닦이여 정돈되더라 나이 26에 임진란(壬辰亂)을 만나 부인과 같이 진주(晋州) 북쪽 설매곡(雪梅谷) 마두산(馬頭山) 산중에 피난(避難)하였는데 그때 왜병(倭兵)이 쳐들어와 공(公)을 만나게 되었는데 왜병이 그를 보니 용모(容貌)가 비상(非常)함에 협박(脅迫)하기를 항복(降伏)하여 왜병을 따를 것을 두 번 세 번 강요(强要)하거늘 공(公)이 정색(正色)하고 크게 꾸짖고 굴(屈)하지 아니하니 마침내 그들에게 해(害)를 당(當)하였다.   또 부인(夫人)을 욕을 보일려고 덤벼드니 부인이 차고 있던 칼을 뽑아 자기의 입(口)베고 젖(乳)을 베고 팔을 끊어 자살(自殺)을 하니 왜병(倭兵)이 그의 충렬(忠烈)에 감복(感服)하고 표(標)를 세워 표창을 써 두고 갔다. 그때에 여덟살의 아들이 있었는데 노비(奴婢)가 이 변(變)을 보고 아이를 업고 도망가서 조부(祖父)의 묘(墓)아래 숨어서 화를 피하였다.   몇 해를 보내고 변(變)을 당한 곳을 찾아가 살피니 어버이 두분께서 안색(顔色)이 생전(生前)과 같았고 피(血) 자욱도 어제와 같으니 통곡(慟哭)하고 수염(收殮)하여 남은 해골(骸骨)을 그땅의 묘좌(卯坐) 쌍봉(雙封)에 장사(葬事) 지내고 선묘조(宣廟朝) 에 정여(旌閭)하였다.   ※ 정려가 본래 묘아래 五十보지점에 있었으나 1979년 8월 풍우로 도괴되었으므로 그곳에 정려대신 비를 세우다.

정 려 비 문 학생정공휘훈진양인야배사천이씨공기개척당풍의수정년이십육조임란부인피우진북설매곡마 두산중왜병견기상모비범욕협이항종재삼강지공안대매종시불굴경피기해우오부인부인발패도 할구할유단비회이자절왜병복기충열건표제포이거시단유팔세자노비견차변부도은어조고묘하오 수세성우변처고비양위안색여생혈흔여작통곡수렴지유여 선묘조사간기려 旌 閭 碑 文 學生鄭公諱薰晋陽人也配泗川李氏公氣慨倜儻風儀修整年二十六遭壬亂夫人避于晋北雪梅谷馬 頭山中倭兵見其相貌非凡欲脅而降從再三强之公顔大罵終始不屈竟被其害又汚夫人夫人拔佩刀 割口割乳斷臂回以自截倭兵服其忠烈建標題褒而去時但有八歲子老俾見此變負逃隱於祖考墓下奧 數歲省于變處考妣兩位顔色如生血痕如昨慟哭收殮只有餘 宣廟朝事間旗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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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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