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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명면지

7. 강재언(姜在彦) <松林里>   은열공(殷烈公) 민첨(民瞻)의 후예(後裔)이고 입곤명(入昆明)한 만송(晩松) 염(濂)의 후손(後孫)이며 자(字)는 현(炫)이요 호(號)는 우암(玗岩)이다.   천성(天性)이 근검독실(勤儉篤實)하여 집안 다스리기에 있어 부모(父母)를 섬기는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였고 가내(家內)의 화목(和睦)과 이웃과의 유대우애(紐帶友愛)는 모두가 본 받을만 하였다.   어버이 섬김에 있어 조석(朝夕)의 식상(食床)과 잠자리의 침구(寢具) 손질까지 결코 가인(家人)에 시킴이 없이 정성(精誠)으로 보살피고 출타시(出他時)에는 아무리 급(急)한 용무(用務)라도 반드시 고(告)하고 나가며 돌아와서는 전후사(前後事) 전말(顚末)을 꼭 아룀을 잊지 않았다.   부모(父母)가 노환(老患)으로 와병(臥病)하자 대소변(大小便) 시중을 극진(極眞)히 하며 또 원근(遠近)을 가리지 않고 양약(良藥)을 구하여 시탕(侍湯)하기에 심혈(心血)을 기울어 지성(至誠)을 다 함은 물론 단(壇)을 모아 쾌유(快愈)를 도천(禱天)하였으나 천불하수(天不遐壽)이었다.   장례후(葬禮後) 한서풍우(寒暑風雨)를 가리지 않고 매일 임묘(臨墓)의 성(誠)을 다하였으니 향유(鄕儒)에서 탁효(卓孝) 덕행(德行)의 사적(事績)을 품조(稟朝)하였던 것인데 불행히도 경술국치(庚戌國恥) 로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었던 때라 주청(奏請)의 효과(效果)도 못 보았으니 향유림(鄕儒林)과 더부러 모두가 개탄(慨嘆)하였다.   후일 일본통감(日本統監) 육군대장 데라우찌(陸軍大將 寺內正毅)으로부터 포창(褒彰)되었으나 본인은 치적(恥敵)으로부터의 상(賞)을 받을수 없다하여 완강(頑强)히 거절(拒絶)하였다.   이에 유림측(儒林側)에서 효도(孝道)는 인본선행(人本善行)이니 후생(後生)의 귀범(龜範)임으로 적국여부(敵國與否)에 상관(相關)없이 받음이 옳다 권하니 부득이 허락(許諾) 수상(受賞)한 바이니 가(可)히 충효(忠孝) 겸전(兼全)의 인물(人物)이라 볼수있겠다.   직계(直系)는 손(孫) 泰失가 부산에 살고있다. ※ 大韓忠義孝烈錄 參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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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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