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곤명면지



곤명면지

4. 강재석(姜在錫)   효자비(孝子碑) 위치: (草梁)   곤명(昆明)의 북쪽 봉계(鳳溪) 윗 마을에 효자(孝子) 있으니 성(姓)은 강(姜)이요, 이름은 재석(在錫)이라 당시의 문인(聞人)인 판서(判書) 김종한(金宗漢)과 보국(輔國) 민병석(閔丙奭) 같은이 들이 그 일을 찬양(讚揚)하여 글로서 행장(行狀) 하니 그 조신여행(操身勵行)이 남에게 추중 (推重) 되어 부노(父老)들이 입을 모아 부러워 하더라.   그가 몰(沒)한지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도 효자(孝子)라 칭(稱)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의 출천(出天)의 효(孝)는 사람 사람이 다 행(行)하지 못하는 효(孝)라고 하겠다. 효자(孝子) 일찍 아버지를 여이고 집이 심(甚)히 가난하여 남의 품을 팔아 품삯으로 어머니에게 숙수(菽水)로 공양(供養)하고 일의 크고 작은 것도 오직 명령(命令)에 따르더니 어머니가 실명(失明)이 되니 좌우에서 부액(扶掖)하고 효양(孝養)을 갖추어 모셨는데 하루는 왼쪽 넷째 손가락을 끊어 피를 먹이니 눈이 다시 밝아져 향당(鄕黨)이 입을 모아 효자(孝子)라 칭찬(稱讚)하였다. 어머니는 천지 일월(天地日月)을 다시 보게되어 지성(至誠)이 아니면 될 일이 아니었다. 그후 몇 달이 지나자 다시 실명(失明)이 되니 효자(孝子) 통읍(痛泣) 호천(顥天)하나 운수인지라 어찌 하리오.

  효자(孝子)의 계출(系出)은 진양(晋陽)강씨(姜氏)로 은열공(殷烈公) 휘 민첨(諱民瞻)이 그의 현조(顯祖)이다. 곤양(昆陽)땅에 살면서 사족(士族)이었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기종(基宗)이고 조부(祖)의 휘(諱)는 성안(聖安)이며 아버지의 휘(諱)는 용환(龍煥)인데 모두 잠덕(潛德)이 있었다.   어머니는 남평문씨(南平文氏)인데 17에 시집와 시부모를 효(孝)로서 섬기고 남편에게 공경하여 범절(凡節)이 가문(家門)을 빛내더니 불행(不幸)히도 일찍 홀로 되매 한때 순종(殉從)코자 목을 몇 번 매었으나 구해(求解)되여 수절(守節)하여 천수(天壽)를 다 하였다.   효자(孝子)의 효(孝)는 그 전수(傳受)함이 었다. 시경(詩經)에 효자(孝子)의 효도(孝道) 다하셨으니 영원(永遠)토록 복(福) 내리시겠네 하니 과연(果然) 이 효자(孝子)에 증험 하겠도다. 그의 아들 명호(明浩) 찬양문(讚揚文)을 갖고와 나에게 비문(碑文)을 청(請)하거늘 그윽히 생각하니 효자(孝子)란 천백인(千百人)의 하는 일과 같지 아니하여 천백인(千百人)의 모범(模範)이 되니 옛 위 정자(爲政者) 가요(歌謠)로서 관현(管絃)에 올려 나라 안에 퍼트려 국민으로 하여금 부르게 하니 비록 우부우부(愚夫愚婦)라도 부모에게 효도(孝道) 하도록 함은 풍속(風俗)과 인윤(人倫)을 두텁게 하는 것이어서 이런 사람이 있어도 알리지 않으면 알지 못하는 법이니라 효자(孝子) 같은이는 조정(朝廷)에서 표정(表旌)함이 마땅한지라 요요히 한조각 돌에 새겨 산기슭에서 세우니 병이(秉彝)의 마음이 참으로 한심하도다.   졸열(拙劣)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위와 같이 찬(撰)하도다.   단기 4292년 기해(己亥) 봄   연일 정 연 준 찬   연일 정 연구 서   사자 명호 읍혈 사손 영주견

곤명북봉계지상유효자성강명재석당시문인여판서금종한보국민병석제공찬양기사상이위문이 기조신려행위인소추중자향리부로류능언지기몰야지금수십년이인무불왈효자개가견기효출어 근천지성이비인인소가득이행야효자조실호가심빈임용이급숙수지공사무거세유명지종급기실 명야좌우부액효양비지일일단지좌수제사지출혈관지구안복명향당칭지왈효재효재모야복견천 지일월비지성소감이능연호수월복맹효자통읍호천이무내어수야계출진양은열공휘민첨기현조 야세거곤양위사족증조휘기종조휘성안고휘룡환개유잠덕비남평문씨십칠이귀사구고효경우군 자규범저우문불행조과욕순종루액루구해전절이종천년효자지효기유소수야여효자불궤영석이 류과험우효자의윤자명호지찬양문청여일언이저우비절유효자자솔수천백인중득일인이기의시 일인자시과출호수천백인지중칙기소행불긍동어수천백인지위이가이위수천백인지범주고고지 위치자채지위가요피지우관현전파국중사인인지이송지수우부우부개지효어친이풍속후이윤서 의금내불연수유시인막지지야여효자자상의유표정이요일편석내립우산지양성가개야기병이소 동불발졸렬감찬차운 단기사이구이년기해춘이월일연일정연준찬 기해하육월 연일정연구서 사자명호읍혈사손영주수 昆明北鳳溪之上有孝子姓姜名在錫當時聞人如判書金宗漢輔國閔丙奭諸公讚揚其事狀以爲文而 其操身勵行爲人所推重者鄕里父老類能言之其歿也至今數十年而人無不曰孝子盖可見其孝出於 根天之性而非人人所可得而行也孝子早失怙家甚貧賃傭以給菽水之供事無巨細惟命之從及其失 明也左右扶掖孝養備至一日斷指左手第四指出血灌之口眼復明鄕黨稱之曰孝哉孝哉母也復見天 地日月非至誠所感而能然乎數月復盲孝子痛泣號天而無奈於數也系出晋陽殷烈公諱民瞻其顯祖 也世居昆陽爲士族曾祖諱基宗祖諱聖安考諱龍煥皆有潛德妣南平文氏十七而歸事舅姑孝敬于君 子閨範著于門不幸早寡欲殉從累縊累救解全節以終天年孝子之孝其有所受也歟孝子不匱永錫爾 類果驗于孝子矣允子明浩持讚揚文請余一言以著于碑窃惟孝子者率數千百人中得一人而己矣是 一人者是果出乎數千百人之中則其所行不肯同於數千百人之爲而可以爲數千百人之範疇故古之 爲治者採之爲歌謠被之于管絃傳播國中使人人知而誦之數愚夫愚婦皆知孝於親而風俗厚彝倫叙 矣今乃不然數有是人莫知之也如孝子自上宜有表旌而寥一片石迺立于山之陽誠可慨也己秉彝所 同不撥拙劣敢撰次云 檀紀四二九二年己亥春二月日延日鄭然準撰 己亥夏六月 延日鄭然龜書 嗣子明浩泣血嗣孫榮柱豎

찬 양 문 우찬양사근안경남유천칙사천군곤명면초량리효자강재석계출진양은열공휘민첨후휘위현현손 휘기종증손휘성안손휘익섭자생유이질성효근천사부모양극지체불행조년고로사편모우효가심 빈구출이임용자급숙수사무거세필품이행일향칭효자차목족돈린화일문란율신려조위사우소추 중승습훈자시기무소자모부인남평문씨강성군시충선휘익점예휘학지녀조저규예시청동지윤부 내칙십칠이귀효우구고조상소천계경욕순자루뢰가인구해행전미망지절무육기자도지이의효자 지성취모부인지력야면유상찬군유상금가견이성지지금불섭야희시제불고수흠작설지포공의유 존도절여울지정기종제재㻦편고원근사림도소이유양본회선부조리이수방백세사건비각이수풍 일방이위돈려지의의유론찬양사 공부자탄항이천사백칠십팔년 월 일 모성공회 회장판서 김종한 부회장 승지 김병흥 찬성장 판서 박기양 고문 보국 민병석 판서 민영인 참판 윤녕구 참판 권익상 승지 김정진 참서 박희양 시종 이종태 찬의장 참령 전면조 교관 조병필 감찰 김병계 도유사 주사 신현태 도유사 유학 송주헌 서무유사 위원 정재열 경학유사 참사 이긍복 전예유사 진사 유진만 간사유사 교관 최승완 교원 문종거 유학 신수보 참봉 백남규 주사 전영준 讚 揚 文 右讚揚事謹按慶南儒薦則泗川郡昆明面草梁里孝子姜在錫系出晋陽殷烈公諱民瞻后諱渭賢玄孫 諱基宗曾孫諱聖安孫諱益燮子生有異質性孝根天事父母養極志軆不幸早年孤露事偏母尤孝家甚 貧窶出而賃傭自給菽水事無巨細必禀而行一鄕稱孝子且睦族敦隣和溢門闌律身勵操爲士友所推 重承襲薰炙是豈無所自母夫人南平文氏江城君諡忠宣諱益漸裔諱學之女早著閨譽視聽動止允符 內則十七而歸孝于舅姑早喪所天係頸欲殉者屢賴家人救解幸全未亡之節撫育其子導之以義孝子 之成就母夫人之力也面有賞饌郡有賞金可見彝性之至今不燮也噫時制不古雖欠綽楔之褒公議猶 存徒切輿菀之情其從弟在㻦遍告遠近士林圖所以揄揚本會先付棗梨而垂芳百世使建碑閣而樹風 一邦以爲敦勵之意依儒論讚揚事 孔夫子誕降二千四百七十八年 月 日 慕聖公會 會長判書 金 宗漢 副會長 承旨 金炳興 贊成長 判書 朴箕陽 顧 問 輔國 閔丙奭 判書 閔泳璘 參判 尹寗求 參判 權益相 承旨 金鼎鎭 參書 朴熙陽 侍從 李種泰 贊議長 參領 全 冕 朝 敎官 趙炳弼 監察 金炳癸 都有司 主事 申鉉台 都有司 幼學 宋柱憲 庶務有司 委員 鄭在烈 經學有司 參事 李肯馥 典禮有司 進士 兪鎭晩 幹事有司 敎官 崔承完 敎員 文鍾擧 幼學 申壽輔 參奉 白南圭 主事 全永俊

  역문: 찬양문(讚揚文)   위의 찬양사(讚揚事)는 경남(慶南)의 유림(儒林) 천거(薦擧)를 삼가 살편즉 사천군 곤양면 초량리의 효자 강재석(姜在錫) 은 진양(晋陽) 에 계출(系出)하여 은열공(殷烈公) 휘(諱) 민첨(民瞻) 의 후(后)이다. 휘 위현(諱渭賢)의 현손(玄孫)이고 휘기종(諱基宗) 의 증손(曾孫)이며 휘성안(諱聖安) 의 손(孫)이고 휘익섭(諱益燮)의 아들이다. 나면서부터 자질(姿質)이 남달라 근천(根天)의 효성(孝性)이 있어 부모를 섬기기를 지체(志軆)의 양(養)을 극진히 하였다. 불행히도 일찍이 아버지를 여이고 편모(偏母) 섬기기를 더욱 효도(孝道)를 다 하였다. 집이 심히 가난하여 품삯으로 숙수(菽水)를 공양(供養)하고 일의 대소사(大小事)를 반드시 살피고 행(行)하니 일향(一鄕)이 효자(孝子)라고 칭(稱)하였고 또 일가간에 화목(和睦)하고 이웃에 돈독(敦篤)하여 화목(和睦)이 가정에 넘치며 율신조행(律身操行)은 사우(士友)에 추중(推重)되니 감화(感化)를 승계(承繼)하여 온 바이었다. 모부인(母夫人)은 남평문씨(南平文氏)니 강성군(江城君) 시(諡) 충선(忠宣) 휘(諱) 익점(益漸) 의 후(后) 휘(諱) 학지(學之)의 여(女)이다. 아직 규문(閨門)의 기룸에 있어 시(視) 청(聽) 동(動) 지(止)는 내칙(內則)에 부합(符合)되었었다. 십칠세에 시집가 시부모에 효(孝)를 다하 더니 일찍 부군(夫君)을 여이고 목을 매어 순종(殉從)코저 하였으나 가인(家人)의 구해(救解)에 힘 입어 미망(未亡)의 절(節)을 지키고 그 아들을 길러 의방(義方)으로서 인도(引導)하니 효자(孝子)의 성취(成就)는 모부인(母夫人)의 힘이었다. 면(面)에서는 떡(饌)으로서 상(賞)을 주고 군(郡)에서는 돈(金)으로서 상(賞)을 주니 그것은 그 이성(彛性)이 지금까지 변하지 아니함을 볼수 있었다. 시법(時法) 이 옛날과 달라 비록 정여(旌閭)의 포(褒)는 없으나 공의(公議)만이 있으니 답답한 정(情)이 간절하도다. 그의 종제(從弟) 재우(在㻦) 원근(遠近) 의 사림(士林)에 고(告)하고 본 회(本會)의 유양(揄揚)을 도모하여 먼저 조리(棗梨)에 부쳐 백세(百世)에 수방(垂芳)하여 비각(碑閣)을 건립(建立)하고 일방(一邦)의 선풍(善風)을 심고저 하니 유론(儒論)에 의하여 찬양 하는 바 이다.   공부자탄강 2478년 월 일   모성공회 회장 판서 김 종 한 외 2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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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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