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합천이씨(陜川李氏) 목사공파(牧使公派) 신기<新基> 시조(始祖) 강양군(江陽君) 휘(諱) 개(開)는 고려조에 불복(不服) 하였으나 정포은(鄭圃隱) 이목은(李牧隱) 의 주청(奏請)으로 사시(賜諡) 문충(文忠)이다. 10세손(世孫)인 공주(公柱)는 당시 진주 목사(牧使)였고 목사공파(牧使公派)의 파조(派祖)이다. 22세손(世孫) 의남(義男)은 호(號)가 만파(萬坡)로 문사(文士)이며 순효사친(純孝事親)으로 이름 높았다. 24세손(世孫) 시양(時陽)이 입곤양(入昆陽)하여 가세(家勢)를 융성(隆盛)시켰으니 세칭(世稱) 솟골 이가(李家)이다. 한말(韓末)의 동학란(東學亂)과 경술(庚戌 1910) 합방후(合邦後) 항일독립운동(抗日獨立運動)에 가담(加擔)하여 가문(家門)이 몰락(沒落) 지경(地境)에 이르러 문중(門中)이 산산(散散)히 흩어져 은신(隱身) 도피(逃避)하였다가 29세손 (世孫) 수희(秀熙)가 새 택지(宅地)로 샛터(新基)에 자리 잡았는데 신기(新基)부락 형성(形成)의 근원(根源)이 되고 입주(入住)한지 6대(代)로서 100년을 상회(上廻)한다. 30세손(世孫) 규정(奎井)은 호(號)가 죽포(竹圃)로 12세(歲)에 통(通)효경소학(孝經小學) 한 수재(秀才)로 갑오년(甲午年)의 일병래협(日兵來脅)에도 굴(屈)하지 않는 지사(志士)였다. 동학의거(東學義擧) 때 옥고(獄苦)로 장독사(杖毒死)한 31세손(世孫) 기호(箕鎬)의 처(妻)는 열부(烈婦)이니 김해김씨(金海金氏)이고 31세손(世孫) 경호(景鎬) 범호(範鎬)는 함께 독립투사(獨立鬪士)었다. 입곤명(入昆明) 이후 손세(孫勢)는 100여 세대(世帶)이나 곤명(昆明)에는 10호(戶)이고 나머지는 하동(河東) 부산(釜山) 등지에 산재(散在)하고 있다. 종손(宗孫)은 32세손(世孫) 원조(源祚)이고 전면장(前面長)과 곤양향교(昆陽鄕校)의 전교(典校)를 지낸 승호(承鎬)는 31세손(世孫)이며 문중대표(門中代表) 원갑(源甲)과 충무시장(忠武市長) 원민(源珉)은 32세손(世孫)이고 동아대(東亞大) 교수(敎授) 부영(富榮)은 33세손(世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