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충주석씨(忠州石氏) 성방<城方> 시조(始祖)의 휘(諱)는 인(隣)이니 중화인(中華人)으로 고려(高麗) 이종조(毅宗朝)의 조인총난(趙仁寵亂 1150년대)을 평정(平定)하고 귀화(歸化)하여 예성군(蘂城君)으로 봉(封)하니 예성(蘂城)이란 충주(忠州)의 고호(古號)이니 이로써 관향(貫鄕)이 충주(忠州)이다. 8세손(世孫) 여명(如明)은 고려말(高麗末)에 입조(入朝)하였다가 이조(李朝) 태종(太宗)의 친서(親書) 소명(召命)에 전조(前朝)에 대한 망복(罔獛)의 의(義)를 지켜 끝내 불응(不應)하여 충주(忠州)의 수의산(守義山)에 들어가 세상(世上)과 인연(因緣)을 끊고 일생(一生)을 마쳤으니 후인(後人) 이 산명(山名)을 수의산(守義山)으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석씨(石氏)가 임진왜란(壬辰倭亂)전에 성방(城方)에 살았다 하나 족보상(族譜上)은 26세손(世孫) 재영(再英)의 기록(記錄)이 있을뿐이고 이상(以上)의 5대(代)는 실묘(失墓)로 되어 있으니 임진왜란(壬辰倭亂)을 전후하여 가변(家變)이 있었음이 짐작된다 다만 산성(山城)에 흐트져 있는 석편(石片) 에 석(石) 자(字)의 각자(刻字)가 있었고 저전동(楮田洞)에서 정동(井洞)사이의 500근(斤)이 넘는 돌다리는 석장군(石將軍)에 의해 놓여 졌다는 전설(傳說)만 남아 있다. 종손 창효(昌孝)는 33세손(世孫)인데 8대(代)에 걸쳐 2가구(家口) 뿐이니 드물게 보는 손세(孫勢) 집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