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여산송씨(礪山宋氏) 충강공파(忠剛公派) 오저<梧苧> 시조(始祖)로부터 11세손(世孫) 휘(諱) 관(侃)은 호(號) 서재(西齋)이오 시호(諡號)가 충강(忠剛)이니 이이가 곧 파조(派祖)이다. 세종(世宗) 문종(文宗) 단종(端宗)의 삼조(三朝)에 역사(歷仕)하였다. 단종(端宗) 사사(賜死) 후 김시습(金時習) 이망월(李望越) 조어계(趙漁溪) 성인재(成仁齋) 등과 같이 계룡산 (鷄龍山) 의 동학사(東鶴寺)에서 어포설단(御袍設壇)하고 상왕혼치(上王魂致) 하여 삼년복상(三年服喪)으로 의분(義憤)을 논(論)하였음이 장능지(莊陵誌) 해동충의록(海東忠義錄)에 기록(記錄)되어 있다. 22세손 재윤(再允)이 영조말(英祖末)에 전남고흥(全南高興)에서 현 곤명 저동(苧洞)으로 이주(移住)하였다 한다. 25세손(世孫) 기호(基浩)는 초량면(草梁面) 집강(執剛)에 在任하였고 27세손(世孫) 갑금(甲金)이 문장(門長)이며 28세손 정제(正濟)는 부산일보(釜山日報) 전무이사(專務理事)로 일하고 있다. 곤명거주(昆明居住)는 200여년인데 손세(孫勢)는 12호(戶)이니 곤명거주는 2호이고 그 외는 부산(釜山) 서울에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