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산성지(山城地) 일명(一名) 석장대(石將台)라고 하며 성방리(城方里) 저전동(楮田洞) 앞산 300m 높이의 산턱에 자리잡고 있다. 산정(山頂)에서는 사천만(泗川灣) 일대(一帶)가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왜장(倭將) 시마쓰(鳥津義弘)가 조선수군(朝鮮水軍)의 위협(威脅)에 대처(對處)코져 사천(泗川) 선진(船津)에 축성(築城)하였으니 부산(釜山)의 자성대(子城台)와 함께 침약교두보(侵略橋頭堡)의 전진기지(前進基地)였다.
지방의병(地方義兵)과 주민(住民)이 왜군(倭軍)의 동태감시(動態監視)와 침략(侵略)에 대비(對備)하여 성(城)을 쌓은 것이라 본다. 산성(山城)봉오리에서 선진(船津) 앞바다를 내려다 보이는 곳에 둔소(屯所)를 차려 왜군(倭軍)의 동향(動向)을 감시(監視)하여 상황(狀況)을 진주성(晋州城)에 보고(報告)할 수 있는 위치(位置)이다. 당시(當時)의 문헌(文獻)을 찾을 길 없어 축성(築城) 내력(來歷)과 활동상황(活動狀況)을 알지 못함이 유감(遺憾)이다. 다만 흩어진 석편(石片)에 석자(石字)의 각자(刻字)가 있고 석장군 (石將軍)이 놓았다는 돌다리가 있다. 이 돌다리를 미루어 보아 임진왜란때 이미 석씨(石氏)가 살고 있었다는 뒷받침이 되기도 한다. 지금 성터(城)에는 잡목(雜木)만 무성(茂盛)하며 성벽(城檗)의 석축(石築)도 허물어져 흔적만을 더듬어 볼수 있는 정도(程度)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