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곤명면지



곤명면지

5. 서봉사 사적지(栖鳳寺 事跡址)   본명(本面) 용산리(龍山里)의 깊숙한 골에 서봉사(栖鳳寺)의 옛 절터가 있다.   사방(四方) 육척(六尺)의 석곽(石槨) 우물은 아직도 건재(健在)하고 거대(巨大)한 주초(柱礎)돌과 목 잘린 해태 상 그리고 6기의 부도(浮屠)가 현존(現存)하고 있음은 당시 전성(全盛)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 절이 언제 창건(創建)되고 언제 폐허화(廢墟化) 했는지를 모르다가 서봉사(栖鳳寺)에 관한 문헌(文獻)이 나옴으로써 역사적(歷史的)으로 중요(重要)한 위치(位置)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절 서봉사(栖鳳寺)에 관한 기록으로는 영봉산(靈鳳山) 용암사(龍岩寺) 중창기(重創記)가 1318(충숙왕5)년에 박전지(朴全之)의 동문선(東文選) 권 68에 수록(收錄)되어 있고 또 서봉사(栖鳳寺) 사적기(事蹟記)가 1762(영조2)년에 이루어진 목판본(木板本) 사지(寺誌)로 현재 동국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니 이 사적(事蹟)을 더듬어 보면 1336년 즉 고려 충숙왕 복위 2년에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쓴 사적기(事蹟記)와 1657년(효종8)에 최응천(崔應天)이 쓴 서봉사기(栖鳳寺記)를 합하여 편찬 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사적기(寺蹟記)중에 고려 시대에 쓰여진 것이 극히 적은 편인데 서봉사에 관한 기록으로 고려 후기의 박전지(朴全之)와 이곡(李穀)의 기문(記文)이 전(傳)해짐은 매우 귀중한 자료(資料)이다.   이제 이 사료(史料)들을 기초로 하여 서봉사의 역사를 살펴 보기로 한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 눌지왕(417-457)때에 이 절이 창건(創建)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진평왕 때는 운집대사(雲集大師)가 문무왕 때에는 의명대사(義明大師)가 이곳에 머물면서 중수(重修)했다.   신문왕 때에는 신라의 두 왕자(王子)가 이곳에 와서 의명(義明)을 스승으로 모시면서 머물었다. 두 왕자(王子)는 곧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이는 신문왕의 아들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인 듯 하다. 이 두 왕자는 신문왕 4년에 이 절을 크게 중창(重創)했다. 새로이 50여칸의 건물을 세웠고 석등(石燈)을 조성 했다. 또한 이들은 대왕대비(大王大妃)를 위하여 금당(金堂)의 주불(主佛) 석가여래(釋迦如來)와 그 보처보살상(補處菩薩像)을 조조(雕造)하여 낙성(落成)하였고 이 때 절 이름을 봉암사(鳳岩寺)라고 했는데 동쪽 봉우리 양봉암(兩鳳岩)에서 취(取)한 것이었다.

  9세기 중엽 법량선사(法涼禪師)가 이 절에 주석 했는데 그는 이 절이 위치한 석봉산(石鳳山)을 영봉산(靈鳳山)으로 고쳤다. 법량(法涼)은 당시 혜해제일(慧解第一)로 손꼽히던 고승(高僧)이다. 법량(法涼)에 대해서는 석천인(釋天因)의 [천 관산기(天冠山記)] 동문선(東文選) 권 68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장흥(長興) 천관산(天冠山)의 구정암(九精庵)에서 전설(傳說)의 법도(法度)를 득(得)하고저 버량(法涼)스님이 이 암자에 와서 참선(參禪)하였는데 처음에는 종소리를 듣고 다음에는 별빛을 보고 삼칠일(三七日)이 되어서는 타라니(陀羅尼)를 얻었는데 그 때에 혜해(慧解)가 제일이라고 일컬었다.   이곡(李穀)의 사적기(寺蹟記)에는 법량(法涼)이 구정암(九精庵)에서 타라니(陀羅尼)를 얻고 이 절에 돌아온 후 자호(自號)를 영봉(靈鳳)이라고 했기 때문에 석봉(石鳳)을 고쳐 영봉산(靈鳳山)이라 했다 한다.   법량(法涼)은 아마도 쌍계사(雙谿寺) 진감선사(眞鑑禪師) 혜소(慧昭 774~850)의 제자 법량(法涼)과 동일 인물 일것으로 추측(推測)된다.   그 후 890년경에 도선(道詵)이 이 절에 주석했다. 하루는 지리산(智異山)의 성모천왕(聖母天王)이 비밀히 부촉해서 말했다. [만일 삼봉(三鳳)에 삼암사(三岩寺)를 세우면 삼한(三韓)이합하여 한 나라가 되고 전쟁이 저절로 종식될 것이다] 이에 도선(道詵)이 세 절을 세웠으니 곧 서봉산(瑞鳳山)의 운암사(雲岩寺) 건봉산(乾鳳山)의 선암사(仙岩寺) 그리고 이 절 영봉산(靈鳳山)의 용암사(龍岩寺)가 그것이다.   이상과 같은 내용은 박전지(朴全之)의 영봉산 용암사(龍岩寺) 중창기(重創記)에 있다.   충숙왕의 명(命)으로 중수(重修)된 용암사(龍岩寺)의 기문에 도선(道詵)에 관한 기록은 유의할 필요가 있다.   고려 때에는 용암사(龍岩寺)가 선암사(仙岩寺) 운암사(雲岩寺)등과 더불어 고려가 후삼국(後三國)통일에 기여한 중요한 사찰(寺刹)로 인식되고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수 있기 때문이다.

  14세기 초(初)인 1314년(충숙왕1)에 이 절이 당시의 국통(國統) 즉 국사(國師)인 무외(無畏)의 하산소(下山所)가 됨으로써 다시 한번 유명해 졌다. 무외(無畏)는 천태종(天台宗)의 고승(高僧)으로 충렬왕때 왕사(王師)였고 충숙왕 즉위(卽位)년인 1313년에 국통(國統)이 되었었다. 이처럼 충렬 충선 충숙왕 등 고려 왕실과 깊이 인연이 있던 그가 1314년에 이 절로 옮겨 옴으로써 고려 왕실의 도움으로 1315년부터 1318년까지 대대적인 중창(重創)이 이루어 졌다. 당시 중창불사(重創佛事)를 박전지(朴全之)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연우(延祐) 갑인(甲寅) 1314년 춘(春) 정월 사(師)가 내전(內殿)에 들어가서 영원사(塋原寺) 주지를 사양했다. 왕이 [이 절을 제외하고는 편안할 곳이 없는데 왜 굳이 사양합니까]고 했다. 사(師)가 답하기를 [내가 본래 주지(住持)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로 맹세(盟誓)하였는데 주지직(住持職)을 면(免)하고서 절이 라는 이름만 얻으면 족(足)합니다.] 쇠잔하고, 성(盛)하고 편하고, 편하지 않는 것으로 괘념을 하겠읍니까]고 하니 그 말씀이 심히 간절하여 왕이 사(師)의 뜻을 어기기가 어려워서 드디어 명(命)하여 이 절로 옮기었다.   1315년에 왕(王)이 전지(傳旨)를 제찰사(提察使) 한중희(韓仲熙)와 염장별감(鹽場別監) 이백경(李白經)에게 내려 이 일을 시작하여 거듭 경영하게 하였다. 1316년 가을에 제찰사 박효수(朴孝修)가 또 다시 왕명(王命)을 받아 크게 역사(役事)를 일으키고 1317년에 제찰사 정안교(鄭安校)와 1318년에 제찰사 이일황(李一貺)과 염장별감 방우정(方于楨)이 또 왕명(王命)을 받아서 역사(役事)를 감독하여 준공하였다.   무릇 새로 지은 것이 80여칸이요 옛 것을 중수(重修)한 것이 20여칸이었다.   기와를 지은 것은 비늘의 차서와 같고 처마 구연은 날개쳐 날으는 것과 같고 분칠한 담은 숫대 놓은 것처럼 종횡(從橫)으로 하였으며 돌 길은 위 아래가 구름처럼 연(連)하였다.   전당(殿堂)의 안은 닥나무 종이로 바르고 왕골로 깔고 두루 단청(丹靑)을 베풀어 장엄(壯嚴)함에 두루 갖추지 않은 곳이 없었다.   금당(金堂)의 주불(主佛) 석가여래상(釋迦如來像)과 별전(別殿)에 봉안(奉安)한 관음(觀音) 정취(正趣) 두 보살을 수리 함에 있어서 사(師)가 스스로 저축한 것을 내놓고 또 모금(募金)하여 여러 인연을 갖추어 황금이 몸에 가득하고 5가지 채색(彩色)이 보살상(菩薩像)에서 번쩍인다.

  대장경(大藏經)을 보충함에는 지난번의 염장별감 이공(李公) 방공(方公)이 따로 왕명(王命)을 받아 설전지(雪牋紙) 3만여장과 칠(漆)을 담은 함 140여개를 만들어 도왔다. 사(師)의 제자인 대선사(大禪師) 승숙(承淑) 중덕(中德) 월생(月生)등이 강화(江華)의 판(板)을 보관한 집에 가서 궐 한함과 궐 한권(卷) 궐 한 장(張)을 찍어 신본(新本)과 구본(舊本)을 합하여 도합 6백여 함(函)을 만들었는데 모두 황색 종이로 옷을 입히고 황색 바닥으로 책갑을 만들어서 새전당(殿堂)과 새 창고 안에 합하여 봉안 하였다.   염장별감 방공(方公)이 다시 왕명(王命)을 받고 1318년 11월 18일에 사(師)를 찾아 원(院)에 들어가서 약 7일간을 성대한 낙성법회(落成法會)를 베풀어 낮에는 대장경(大藏經)을 읽고 밤에는 현묘(玄妙)한 뜻을 말하여 왕(王)의 수(壽)를 빌고 만민(萬民)을 복(福)되게 하였으니 능히 일이 끝난 것이다.   이상은 무외국사(無畏國師)가 이 절에 주하게 된 것을 계기로 고려왕실의 힘을 빌어 이룩된 중창불사(重創佛事)의 규모(規模)를 알게 해 준다.   그 후 무외국사의 제자 승숙(承淑)은 이곡(李穀)에게 부탁 이 절의 사적을 기록케 했는데 1336년(충숙왕위2년)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약 300년간의 기록은 빠져 있어 이 절의 역사를 알 수가 없다.   조선시대에 접어 들어 언제부터인가 이 절은 서붕사(栖鳳寺)로 이름이 바뀐 듯 하다. 물론 고려 때 까지는 용암사(龍岩寺)로 불렸을 것이다.   이조 광해군(光海君) 6년인 1614년에 의현(義玄)스님이 중창(重創)했고 이로부터 8~9년 후인 1622년 및 1623년에는 일겸(一岑) 경희(敬熙)등이 서로 발원해 불전(佛殿) 및 동서선실(東西禪室)을 지었다.   최응천(崔應天)이 1657년(孝宗8)에 서붕사기(栖鳳寺記)를 썼음은 이미 앞에서 말한 내용과 같지만 이 당시 절의 규모도 대단하여 다음과 같은 전당(殿堂)이 늘어서 있었던 것이다.   대웅전(大雄殿) 구층탑(九層搭) 팔상전(八相殿) 영산전(靈山殿) 명부전(冥府殿) 영자전(影子殿) 향로전(香爐殿) 붕황루(鳳凰樓) 붕하루(鳳下樓) 선당(禪堂) 승당(僧堂) 동상실(東上室) 서상실(西上室) 청산요(淸山寮) 두월요(斗月寮) 함월당(含月堂) 만월당(滿月堂) 매구당(梅口堂) 열반당(湟槃堂) 붕황문(鳳凰門) 세진정(洗塵亭) 등이 있음이다.   17세기 중엽의 미륵암(彌勒庵)과 붕암(鳳庵)과 직조암(直照庵)의 동서남(東西南)의 삼암(三庵)은 서붕사에 속한 암자였다. 직조암(直照庵)에 대해서는 무용(無用)수연(秀演)이 1651-1719에 쓴 영남로(嶺南路) 곤양군(昆陽郡) 붕명산(鳳鳴山) 직조암(直照庵) 신성모연문(新成慕緣文)이 전해 진다. (無用堂集卷下)   이에 의하면 서북사 남쪽 백보쯤 밖의 절 터가 있었고 광밀(廣密)이라고 하는 스님이 직조암 재건(再建)의 발원을 세웠던 것이다.   조선 중기 이곳 서붕사에서는 불전(佛典)을 간행(刊行) 그 인본(印本)이 서울 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 되어 있다.   1599년(선조32)에 간행된 묘법연화경(妙法蓮花經) 언해(諺解)를 비롯하여 묘법연화경(妙法蓮花經) -1649간- 운수단가사(雲水壇謌詞) -1659간- 천진명양(天地冥陽) 수육재(水陸齋) 찬요(纂要) -1659간-등이 있고 또한 간행년도를 알수 없는 묘법연화경(妙法蓮花經)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판본(版本)이라 하며 그 목판이 50년전에 이 사지(寺址)에서 발견(發見)되었으나 모(某)인(人)이 비장(秘藏)하였다 하니 이는 국보급(國寶級)이라 한다.   사지(寺址) 뒷산에 산재(散在)하고 있는 다(茶)나무는 중국(中國)에서 전래(傳來)될 적에 먼저 시식(試植)되었다 하며 진상(進上) 작설다(雀舌茶)의 산지가 이곳이라 한다.


담당자
문화체육과 문화예술팀 055-831-2714
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만족도 조사 민원신청  시장에게 바란다  조직도  공지사항  공고/고시/시험 
페이지 수정요청열기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시나요?

평가: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