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곤명면지



곤명면지

4. 단종대왕태실지(端宗大王胎室址)   순조32년(1832)에 완성된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의 곤양군읍지(昆陽郡邑誌)산천 조(山川條)에 의하면 [소곡산(所谷山)은 군의 북쪽 25里되는 지리산 남록(南麓)에 있다. 진주의 옥산(玉山)이동쪽으로 와서 주맥(主脈)을 삼았는데 세종대왕과 단종대왕의 양묘(兩廟) 태실이 봉안되어 있다]라고 했다.   즉 단종대왕 태실지는 곤명면은사리의 산438번지에 있는데 이 태실지는 경상남도 지정 기념물(慶尙南道指定記念物) 제 31호( 1972. 2. 12 및 1974. 12. 28)로 지정되어 있다.   세종대왕은 그의 23년(1441)에 애손(愛孫) 단종이 탄생하자 자신의 태실 앞원구상(圓丘上)에 단종의 태실을 축조토록 하여 그 해에 태실이 축조되었다.   태실 조영기(胎室造營記)에 의하면 태를 산에 묻는 것을 안태(安胎)라 하고 안태산(安胎山)을 태봉(胎峯)이라고 한다.   왕자나 공주가 태어나면 태를 곧장 백자(白磁) 항아리에 넣어 산실내에 두었다가 7일내에 길일을 택하여 까다로운 격식의 세태(洗胎)를 한다.   이와같이 깨끗이 씻은 태는 다시 백자 항아리에 담고 또 이보다 조금 큰 항아리에는 당시의 주화(鑄貨)인 개원통보(開元通寶)를 개원(開元)의 자면(字面)이 보이도록 깔고 그 위에 태를 넣은 항아리를 넣는다.   그리고 그 대소(大小) 항아리의 사이에는 감당단편(甘糖丹片)으로 봉하고 다시 밀봉한다. 이러한 안태 풍속에 대하여 선조실록에 의하면 라여조(羅麗朝)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정유재란(1597) 때 왜장 시마쓰(鳥律義弘)가 이끄는 왜적들이 몰려와 규모가 비교적 큰 세종대왕의 태실은 파괴하였으나 단종대왕의 태실은 화를 면했다.   영조7년(1730) 2월에 수리했고 동 10년(1733)에 단종대왕 태실비를 세웠다.   이 태실지가 있는 임야 3,600평은 일제 때 경복궁에서 개인에게 불하했고 태는 서울로 옮겨갔다 한다.   태실지에는 사설 묘가 성분되어 있고 지금은 파손된 귀부(龜趺)와 연화석(蓮花石)이 남아 있다.   碑石 長 5尺6寸5分   廣 1尺7寸   厚 7寸5分   前面刻 端宗大王胎室   後面刻 崇楨紀元後一百七年   甲寅九月初八日建(1734) 참고 오래전부터의 전설은 세종태실(世宗胎室)을 신태봉(新胎峰) 단종태실(端宗胎室)을 구태봉(舊胎峰)이라 부르고 있는데 세종태실(世宗胎室)의 이안(移安)에서 나온 말로 추정(推定)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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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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