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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명면지

22. 원모재기(遠慕齋記)   옥산(玉山)의 남쪽 20리에 삼정(三亭)마을이 있고 삼정(三亭)의 외동(外洞)이 방광(放光)인데 우리 김씨(金氏)가 거주하고 있다. 선대(先代)에 훈도공(訓導公)우남(遇南)이 있어 진사(進士) 이공원경(李公元卿)과는 사생(死生)의 교(交)를 맺었었다. 광해조(光海朝)에 원경(元卿)의 아우 위경(偉卿)이 부귀(富貴)에 망(卒)함을 보고 느낀바 있어 곧 남하(南下)하여 진주영현(晋州永縣)의 혼둔산중(混迍山中)에 숨어 살았었다. 그뒤에 여러번 옮겨 나중에 방광(放光)에 이르러 거(居)한지 수대(數代)가 되었다. 하루는 제족(諸族)이 모여 서로 모의(謀議)하였는데 우리 선조(先朝)가 남하(南下)함은 세상이 어지러워 피난을 왔지 세상(世上)에 이름을 알리고자 함이 아니었다.

  그러니 자손(子孫)되고 그 사실을 잊어서는 사람이 아닐것입니다. 비록 이곳은 공(公)이 은거(隱居)한 곳은 아니나 조선(祖先)의 영(靈)은 물이 땅에 있는 것 같아서 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니 이곳에 일옥(一屋)을 영건(營建)하여 우모(寓慕)함이 좋지 않을까 하니 모두가 좋다고 승낙(承諾)하여 수력출자(隨力出資)하여 마을 동(東)쪽에 터를 잡아 종택(鍾澤)군이 그의 종형(從兄) 종찬(鍾讚)과 같이 이뤘으니 즉 오영사가(五楹四架)를 지어 방(房)과 실(室) 헌(軒)과 당(堂)이 완비(完備)되었다. 증자(曾子)의 신종추원(愼終追遠)의 뜻을 취하여 원모(遠慕)라 편(扁)하고 나에게 그 시말(始末)을 기(記)하는 글을 지어라 하기에 가만히 생각하니 세상의 치란(治亂)이 상승(相乘)하고 성쇠(盛衰)가 바뀔때 스스로 판단하여 거취(去就)를 기결(幾決)하여 수의자정(守義自靖)하는 사람이 어찌 훈도공(訓導公)뿐이 겠는가 혹은 현(顯)하고 혹은 회(晦)하여 일은 비록 다름이 있으나 돈세무민(遯世無悶)하여 시심마타(矢心靡他)는 공(公)과 같은 사람은 적으리라 진사이공(進士李公)을 만사(挽辭)하여 그대 경오(庚午)에 나고 나도 경오(庚午)에 나서 생사(生死)를 같이 하기하니 골육(骨肉)같이 친(親)하였다. 이 시(詩)는 이공(李公)을 개장(改葬)할때에 광(礦)에서 나오니 그의 기이(奇異)한 행적(行蹟)과 견의(見義)의 밝음을 가리우지 못하리라. 그의 마음 밝음이 이와 같았으므로 이제 후손(後孫)된 사람 그 뒤를 이어 추원(追遠)의 일에 힘을 쏟아 이 재(齋)를 이루어 제족(諸族)을 모아 효제(孝弟)를 강(講)하니 시경(詩經)에 언제나 효도(孝道)다하니 효도(孝道)는 선왕을 본 받은 걸세 하니 그 꼭 그러하다 하니라. 효도(孝道)는 백행(百行)의 근원(根源)이라 근본(根本)이 서면 도생(道生)하나니 이로써 훈도공(訓導公)의 가언(嘉言)과 의모(懿모(模))를 생각하여 그의 풍운(風韻)을 떨어 트리지 아니하면 그 현(顯)하고 회(晦)함이 공(公)에게 있건 없건 김씨(金氏)의 후손(後孫)이 창성(昌盛)할 것을 기약할 것이로다. 내 글이 비록 그의 아름다움에 이루지 못하이에 백열(栢悅)의 감(感)이 있어 대략(大略) 이와 같이 쓰니라.   족후손 선익(善益) 근찬(謹撰)

원 모 재 기 옥산지남이십리유삼정리삼정지외동왈방광이오종금씨거지기선유훈도공우남여진사이공원경 결사생지교당광해조견위경졸부귀위경원경지제야수약여남하은우진주영현혼돈산중회적이몰 세기후루천사거우방광자역수세의일일제족상여모왈시오조지남하야위구어세고불욕지명어세 연위자손이망지칙비인야차지수비공은거지지조선지령여수재지무徃불재영건일옥어차이위우 모불위가호함왈유유수력출자서우리동송림지오축지위오영사가방실헌당완비종택군여기종형종 찬극돈기사취증자신종추원지의편이원모속여기기시말여절유세지치란상승성쇠교체지제능선 기결거취수의자정자기독훈도공이기재혹현혹회사수유수유둔세무민시심미타여공자개선의만 진토이공시왈군생경오아경오생사상동골육친일구결차시이공개폄시출어광중기기이지적견의 지명수불가엄의기심병연여차고금제후손극승기무진력어추원지사영건시재취족강효제지도시 운영언효사효사유칙불기신연호부효자백행지원야본립도생유시이익추사훈도공가언의모물추 기풍운칙기위현위회불족유무어공이김씨지후창가기야여수문불족이성기미의이자유백열지감략 서여차이 족후손 선 익 근찬 遠 慕 齋 記 玉山之南二十里有三亭里三亭之外洞曰放光而吾宗金氏居之其先有訓導公遇南與進士李公元卿 結死生之交當光海朝見偉卿卒富貴偉卿元卿之弟也遂約與南下隱于晋州永縣混沌山中晦跡以沒 世其后累遷徙居于放光者亦數世矣一日諸族相與謀曰始吾祖之南下也爲拘於世故不欲知名於世 然爲子孫而忘之則非人也此地雖非公隱居之地祖先之靈如水在地無徃不在營建一屋於此以爲寓 慕不爲可乎咸曰唯唯隨力出貲胥于里東松林之塢築之爲五楹四架房室軒堂完備鍾澤君與其從兄鍾 讃克敦其事取曾子愼終追遠之義扁以遠慕屬余記其始末余窃唯世之治亂相乘盛衰交替之際能先 幾決去就守義自靖者豈獨訓導公而己哉或顯或晦事雖有殊唯遯世無悶矢心靡他如公者盖鮮矣挽 進土李公詩曰君生庚午我庚午生死相同骨肉親一句缺此詩李公改窆時出於壙中其奇異之蹟見義 之明遂不可掩矣其心炳然如此故今諸後孫克承其武盡力於追遠之事營建是齋聚族講孝弟之道詩 云永言孝思孝思維則不其信然乎夫孝子百行之源也本立道生由是而益追思訓導公嘉言懿謨勿墜 其風韻則其爲顯爲晦不足有無於公而金氏之後昌可期也余雖文不足以成其美矣而玆有栢悅之感略 書如此爾 族後孫 善 益 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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