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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명면지

19. 오봉재중건기(鰲峯齋重建記)   선조(宣祖) 임란(壬亂)에 국운(國運)이 위급(危急)하매 초택(草澤)의 선비들이 의병(義兵)을 이르켜 크게 분발하여 강세(强勢)인 왜구(倭寇)를 무찔어 일방(一方)을 보장(保障)하더니 정공(鄭公) 같은분 흔치 아니 하더라 공(公)의 휘(諱)는 대수(大壽)인데 원래(元來) 지행(至行)이 있고 지기(志氣)가 높아 항상(恒常)일을 하여 스스로를 표현(表見)코저 하더니 일찍이 이탄수(李灘叟) 선생(先生)을 찾아 의리(義理)를 알더니 그때 주쉬(主倅)인 이광악(李光岳)은 곧 탄수(灘叟)의 손자(孫子)였다. 공(公)의 도움을 얻어 일경(一境)을 평안(平安)하였다. 난정(亂定)한 후에 기미(幾微)를 조금도 사색(辭色)에 보히지 아니하였다.

  금오산(金鰲山)에 들어가 선영하(先塋下)에 집을 지어 첨묘(瞻慕)의 정성을 붙이더니 자호(自號)를 오봉(鰲峯) 노수(老叟)라 하더라 수(壽)가 팔십세 노인이 지나니 나라에서 특별히 가선첨추(嘉善僉樞)에 가은(加恩)하였다. 양례(襄禮)를 군(郡)의 북쪽 십리(十里) 용봉산(龍鳳山) 동곡(銅谷)의 유좌(酉坐)에 모시다 그의 자손(子孫)은 대현(大峴)과 금성(金城)에 산거(散居)하는데 모든 자손이 번연(蕃衍)하였다. 하나 아직 묘각(墓閣)을 이루지 못하다가 광무임인(光武壬寅:1902)에 의론(議論)하여 의견(意見)일치로 수영(數楹)을 처음으로 건축하여 오봉(鰲峰)이라 현판(懸板)하다 이로써 제숙(薺宿)의 사(舍)와 전생(奠牲)의 실(室)과 척탁(滌濯)의 곳이 다 갖추웠으니 제사(祭祀)에 유감(遺憾)이 없느니라. 객(客)이 힐문(詰問)하는자(者) 있어 말하기를 감히 묻노니 생전(生前)의 표덕(表德)으로써 재호(齋號)를 삼는 것이 거(據) 있나요 하거늘 대답하되 혹(或) 일도(一道)이니 유속(流俗)에 뇌동(雷同)하지 아니함이라 하고 또 자손(子孫)이 조선(祖先)에게 명(名)은 휘(諱)하고 호(號)는 휘(諱)하지 아니 하니 호(號)로서 그 재호(齋號)를 부른즉 조선(祖先)이 이 곳에 계시는 것 같아서 효제(孝悌)의 마음이 유연(油然)히 생(生)하여 사사여사생(事死如事生) 하는것과 같지 않으리요 하니 객(客)이 그렇다 하더라.   오랜 세월(歲月)에 난(欄) 함(檻) 최(穰) 각(桷) (난간과 서까래)가 풍우(風雨)에 시달려 전복(顚覆)에 이르렀더니 기해(己亥:1959)년 봄에 그 옛터에 중건(重建)하니 환연(煥然)히 옛과 같으니라. 정군(鄭君) 재희(在禧)와 희조(禧祚) 재규(在奎)가 와서 공사(工事)를 말하고 기문(記文)을 요(要) 하거늘 내 옷깃을 여미고 탄(嘆)하여 말하기를 정씨(鄭氏)가 와서 위선(爲先)에 긍구(肯構)의 근(勤)이 이와 같으니 타일(他日)에 사즙(嗣葺)은 물을 것도 없고 치심수신(治心修身)에 근(勤)하지 아니함이 없으면 공(公)의 영(靈)이 양양(洋洋)히 기뻐하여 말씀하기를 나에게 후손이 있어 기(基)를 버리지 아니한다. 하리라 이를 써서 면행(勉行)케 하니라.   경자(庚子:1960) 청명절(淸明節)   안동(安東) 권도용(權道溶) 기(記)

오 봉 재 중 건 기 목릉집서국보공극초택백의지도창기의려분정대호이알치장지구위일방보장여정공자개불다 득언공휘대수소유지행이지기탁락상욕유소수입이자표견조유이탄수선생연경지문개의이긍계 기시주졸이광악즉탄수지손야뢰공찬화일경이안란정무기미견어색사입금오산선영하결옥이우 첨모지성자호오봉로수이수제팔질특가은가선첨추장의이어군치북십리용봉산동곡배유지광이 운잉지산재대현금성자홍지무가초료심번제미황묘각지역광무임인순모첨동시축수영방이오봉 어시제숙지사존생지실척탁지소개구이장사무유감의객유힐지자왈감문용생전표덕서제묘실억 유거호왈시혹일도야가위백직이무만어류속지뢰동의차운잉지어조선휘명불휘호이기호호기재 칙황여조선지재시야이효제지심기불유연이생장무동어사사여생호객이위연세월자구란함양각 위풍우소표요수지전복기해은춘잉기지이중건환연매우고의정군재희희조재규래술공사요기기 개여감임탄왈정씨지어위선긍구지근여차이일지끽끽사즙고물용문이어치심수신이계역강혹불 근공지영서기양양이희왈여유후불기기호수서차이욱지 경자청명절 안동권 도 용 기 鰲 峯 齋 重 建 記 穆陵執徐國步孔棘草澤白衣之徒倡起義旅奮挺大呼以遏鴟張之寇爲一方保障如鄭公者盖不多 得焉公諱大壽素有至行而志氣卓犖常欲有所樹立以自表見早遊李灘叟先生延慶之門開義理肯綮 其時主倅李光岳卽灘叟之孫也賴公賛畫一境以安亂定無幾微見於色辭入金鰲山先塋下結屋以寓 瞻慕之誠自號鰲峯老叟以壽躋八耋特加恩嘉善僉樞臧衣履於郡治北十里龍鳳山銅谷背酉之壙而 雲仍之散在大峴金城者洪支茂柯椒聊甚蕃苐未遑墓閣之役光武壬寅詢謀僉同始築數楹牓以鰲峯 於是齊宿之舍尊牲之室滌濯之所皆具而將事無遺憾矣客有詰之者曰敢問用生前表德暑諸墓室抑 有據乎曰是或一道也可謂白直而無挽於流俗之雷同矣且雲仍之於祖先諱名不諱號以其號呼其齋 則怳如祖先之在是也而孝悌之心豈不油然而生將無同於事死如生乎客以爲然歲月滋久欄檻欀桷 爲風雨所漂搖垂至顚覆己亥殷春仍其址而重建煥然邁于故矣鄭君在禧禧祚在奎來述工事要記其 槪余歛袵嘆曰鄭氏之於爲先肯構之勤如此異日之喫喫嗣葺固勿庸問而於治心修身以繼亦岡或不 勤公之靈庶幾洋洋而喜曰余有後弗棄基乎遂書此以勗之 庚子淸明節 安東權 道 溶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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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3 16: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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