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정씨(晉陽鄭氏) 은열공파(殷烈公派) 흥사(興士) 원조(原祖)의 휘(諱)는 자우(子友)이다. 6세손의 휘는 신열(臣烈)이고, 호(號)는 관정(官亭)이며, 시호(諡號)는 은열(殷烈)이니 파조(派祖)이다. 고려 현종시(顯宗時)에 문무겸비한 성리학(性理學)의 대가이고, 거란의 난(亂)에 공을 세워 진산부원군(晉山府院君)에 봉(封)하여졌다. 만년에 진주 소남에서 정거(定居)하니, 소남(召南)을 공(公)의 호를 따라 관정(官亭)이라고도 한다. 이후 휘 진경(晋卿)을 중시조 1代로 하여 3세손 휘 유(愈)ㆍ손(遜)ㆍ근(懃) 3형제 중 부영공(副令公) 근(懃)의 후손이다. 12세손 휘 대수(大壽)ㆍ대명(大命) 형제분이 대평면(大坪面) 마동(馬洞)에서 출생하였으며, 형 대수(大壽)는 통정대부(通政大夫)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의 관직을 지내었고, 호(號)는 오봉(鰲峯)이다. 임진왜란 때에 큰 아들 이함(以諴)은 의병으로 고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때부터 하동(河東)군 금남면 대치에 정착하였는데 후손 들 중에서 많은 거부(巨富)와 인물이 배출되었으며 지금은 재실과 유허비등이 있다. 아우 군자감참봉(軍資監參奉) 대명(大命)은 다시 곤양 입향조 이시다. 지금은 타지로 많이 이주하고 흥사에는 10여 호가 살고 있다. 이곳에 삼인재(三仁齋)을 창건하고 입향조(入鄕祖) 휘 대명(大命)을 위시하여 조상과 선조를 제향(祭享)하고 있으며 종회장(宗會長)은 주수(周秀)이고 종손(宗孫)은 대인(大仁)이다. 24세손 재실(在實)은 곤양향교(昆陽鄕校) 전 전교(前典校)로 유교 진흥(儒敎 振興)에 힘쓰고 면의회(面議會) 의원(議員)을 지냈고, 정일(政一)은 곤양농업협동조합장(5선)을 지냈으며, 정규(政圭)는 사천택시 대표이고, 25세손 용권(鏞權)은 도청에서 사무관을 26세손 대경(大璟)은 부산시경 경리 감사담당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