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진(恩津) 송씨(宋氏) 고창공파(高敞公派) 목단(牧丹) 시조(始祖)의 휘는 대원(大原)이다. 고려조에 판원사(判院事)를 지냈다. 판원사(判院事)는 판중추부사(判中樞府使),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 판한림원사(判翰林院事) 등을 일컫는 말이다. 또는 시조의 초명(初名)은 견(堅)이고 자는 천지(川至)로 은진군(恩津君)에 봉해졌다 한다. 은진송씨세보(恩津宋氏世譜)에 의하면 회덕(懷德)에 세거(世居)하게 된 것은 4세(世) 휘 명의(明誼) 때이다. 명의는 호가 건재(乾齋)인데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지내다가 고려 말에 국운이 기울자 회덕으로 내려와 은거하였다. 5세(世) 휘 극기(克已)는 고려조 성균진사로 일찍 하직 하였다. 부인 류씨(柳氏)는 22세의 젊은 나이인데도 부모의 개가(改嫁)권유를 뿌리치고 네 살 박이 아들을 업고 개성(開城)에서 회덕(懷德)으로 내려와 시부모(媤父母)를 모시고 아들을 길렀으니 오늘날 은진 송씨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은진 송씨는 조선조에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무엇보다 문묘(文廟)에 종사자(從祀者)를 둘씩이나 낸 것이 이 집안의 큰 자랑이다. 6세(世) 휘 유(愉)는 호가 쌍청당(雙淸堂)이고, 부사용(副司勇)의 벼슬을 가졌다. 7세(世) 휘 계사(繼祀)는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었다. 8세(世) 휘 요년(遙年)은 목사(牧使)였다. 9세(世) 휘 여림(汝霖)은 통훈대부(通訓大夫)였다. 13세(世) 휘 국사(國士)는 고창공(高敞公)이니 파조이다. 14세(世) 휘 규운(奎運)은 우암선생(尤菴先生)에게 수업하고 이조참판(吏曹參判)의 벼슬에 올랐다. 15세(世) 휘 상완(相浣)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였다. 16세(世) 휘 필용(必龍)은 계가선(階嘉善)이었다. 17세(世) 휘 재로(載老)는 통훈(通訓)에 추증되었다. 18세(世) 휘 형정(亨鼎)은 선릉참판(宣陵參判)이다. 20세(世) 희인(喜仁)이 하동(河東) 악양(岳陽)에서 곤양으로 이거하였다. 총 20여 호였으나 대부분 다른 지방으로 이거하고 현재 곤양에는 9호가 살고 있다. 문중대표는 장래(長來)이고, 종손은 24세손 만수(萬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