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晋陽) 강씨(姜氏) 박사공파(博士公派) 무고(舞鼓) 시조(始祖)는 고구려(高句麗)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이신 강이식(姜以式) 장군이다. 후손 계용(啓庸)은 고려 원종조에 국자박사(國子博士)로서 박사공파의 파조(派祖)이다. 3세(世)의 휘는 사첨(師瞻)인데 고려 감찰어사(監察御使)를 하여 이를 어사공파라 한다. 4세(世) 창귀(昌貴)는 충목왕(忠穆王) 2년에 판도정랑을 거쳐 계림판관(鷄林判官)을 지냈으며 사후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추증(追贈)되고, 진원부원군(晋原府院君)에 봉하여졌다. 7세(世) 휘 회백(淮伯)의 호는 통정(通亭)이다. 고려 우왕(禑王) 2년에 급제하여 성균(成均) 제주(祭酒) 밀직사 제학 부사 첨서사서를 역임하였다. 공양왕(恭讓王) 때에 세자사(世子師)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이어 판밀직사와 이조판서를 겸임하였다. 왕에게 상소(上疏)하여 한양천도(漢陽遷都)를 중지하도록 하였으며, 포은선생(圃隱先生)이 살해된 후 그의 일파로 몰려 진양(晋陽)에 유배되었다가 개국(開國) 후에 동북면 도순무사가 되었다. 수 대(代)를 흐른 후 16세(世) 언룡(彦龍)은 현종 때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다. 20세(世) 휘 필용(必庸)때에 곤양으로 들어왔다. 사천(泗川), 완사(浣紗),북천(北川) 등지에 10여 호가 살고 있고, 무고에도 10호가 살고 있다. 휘 태수(泰守)는 동학혁명(東學革命)의 교주였고, 문중(文中)은 문중 사람들과 협의하여 조상들의 제실(祭室)인 무산재(武山齋)를 원동(院洞)에 창건하였다. 문중대표는 호철(鎬喆)이고, 종손은 호길(鎬吉)이다. 학중(學中)은 경찰공무원을 역임하였고, 호현(鎬玄)은 양산초등학교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