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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6. 고승당 산성 전투(高僧堂 山城 戰鬪)와 곤양   금오산 전투가 끝난 후 일본군은 무자비한 소탕계획을 세웠다. 11월 10일(음10월 13일)자로 부산총영사관에서 특명정권공사 정상형(井上馨)에게 보고한 경상도 진주지방의 동학당의 퇴산과 동지(同地)파견군대의 계속주둔보고서에서 소위 <조선인투서>라는 것을 첨부하였는데 이 투서의 내용을 보면 당시 전주민은 일본군의 주둔을 원하고 있는것처럼 ‘마치 대한(大旱)에 감우(甘雨)를 만난 것 같아서 감사하기 짝이 없다.’는 등으로 위작되어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위작문에서 “각 고을의 동학을 제거하려면 먼저 진주(晋州)의 동학을 제거해야 하고 진주의 동학을 제거하려면 먼저 덕산의 동학을 제거해야 한다. 삼장(三壯), 시천(矢川), 청암(靑岩), 사월(沙月) 등 마을의 양반이나 상민이 모두 동학의 침로를 받고 있다. 영우(嶺右) 각 고을의 동학은 덕산(德山)으로부터 나왔으니 덕산을 소굴이라”하고 동학 5명 이상을 숨겨둔 동수(洞首)는 처형하거나 귀향을 보내고 접주를 숨겨둔 자는 즉시 죽이며 10명 이상의 마을은 동학을 하고 아니하고를 논하지 않고 한마디로 그 집을 불태우며 접주와 동학도는 모조리 죽인다는 법을 만든 후에야 동학을 모조리 제거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주의 동학군은 최후의 결전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진주, 곤양, 하동, 남해, 사천, 단성 등지의 동학지도부는 진주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총공격하기로 결의하고 단성지구로 총집결 하였다. 󰡔천도교창건사󰡕에 살펴보면 “이때의 동학접주는 진주의 손은석, 박재화(朴在華), 김창규(金昌奎), 백주응(白周應), 곤양(昆陽)의 김성용(金成龍), 하동(河東)의 여장협(余章協), 남해(南海)의 정용태(鄭容泰), 단성(丹城)의 임말룡(林末龍), 사천(泗川)의 윤치수(尹致洙) 등이라”했고 <신인간> 제17호에 보면 “진주(晋州)의 손은석, 박재화, 백주응, 김용기, 김상정, 곤양(昆陽)의 김성룡, 사천(泗川)의 윤치수, 함안의 이재향, 단성(丹城)의 임말용, 하동(河東)의 여장협, 남해(南海)의 정용태”라고 되어있다. 이리하여 진주지역 동학군은 단성에서 단성현감 장덕근(張悳根)의 협조를 받아 진을 치고 있던 중 일본군이 온다는 정보를 듣고 지세의 불리함을 예견하여 수곡으로 이동하여 건너편 고성산으로 이동하였다. 고성산은 천혜의 요새지로서 동학군이 석루를 더 축성하여 일본군에 대비하였다. 이 때에 일본군 제4중대장 영목(鈴木)대위는 3개 소대로 편성된 1개 중대를 이끌고 水谷으로 진격했다. 그리하여 고성산의 동학군과 일본군은 치열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당시 부산에 있던 일본병참 사령감에게 보고한 「경상도서남부폭격피보고서(慶尙道西南部爆擊壞報告書)」에 의하면 11월 10일(음 10월 13일) 단성지방에 운집한 동학도가 곤양을 습격하려는 상황을 정탐하여 알고 영목(鈴木)대위는 11일과 12일 먼저 역격하기 위해 전대(全隊)를 거느리고 수곡(水谷)에 도착하여 동학도 약 5천명이 고성산성에 운집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였다. 이 때가 오전 8시 5분, 동학군이 먼저 총을 발사하여 습격하려 함으로 일본군이 신식무기를 이용하여 격전이 전개되었는데 10시 15분에 일본군 등판(藤坂)소위의 1소대가 고함을 지르면서 산상의 석루에 돌입, 동학군을 격퇴하였다. 이 전투로 일본군 상등병 고교천지(高橋淺治) 일등졸 소야산축송(小野山丑松) 동 등본원재위문(藤本源在衛門) 등 3명이 총상으로 부상하였고 길천조장(吉川曹長)이 거느리는 소대는 우측에서 습격한 동학군에 당하였다. 오전 11시에 전투는 끝났는데 동학군은 산산히 흩어져 덕산(德山) 방향으로 후퇴하였다. 그리하여 동학군의 피해는 전사 186명, 생포 2명, 화약 30관, 한전(韓錢) 6관 7백 90문, 승마 17두, 소 2두, 잡품가마니 1개, 쌀 5두, 총 136정, 칼 18자루, 나팔 3개, 큰북 3개, 기 3개, 화살 2속, 탄환 약 5관, 동제발(銅製鉢) 5개, 창 54자루를 노획했다고 「주한일본공사」 기록에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진주지역의 동학군은 일본군 1개 중대의 신예무기의 위력 앞에 패하고 말았다.   <천도교 100년사>에 의하면 10월 14일(양력 11월 11일) 전사자는 사천의 수접주(首椄主) 김성용(金成龍), 대정최기현(大正崔璣鉉), 중정강오원(中正姜五元), 곤양의 대정최몽원(大正崔蒙元), 김경달(金敬達), 최성준(崔聖俊), 한명선(韓明善), 김명완(金命完), 중정강몽생(中正姜蒙生), 김차계(金且桂), 조성인(趙性仁), 집강 최학권(執綱 崔鶴權), 신관준(申寬俊), 서사 김화준(書司 金華俊)으로 밝히고 있다. 당시 곤양면 관내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동학군에 가담하여 옥종면 고승산성전투에도 참전하여 많은 희생자가 있었는데 곤양면 환덕리 본촌에서는 신관오(申觀梧), 신관준형제(申寬俊兄第)가 고승산전투에 참전하여 형신관오(兄申觀梧)는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벼논에서 몸을 은신하였다가 다음날 야간을 이용하여 밤새 걸어서 귀가 후 집뒤 산록에 굴을 파고 떼를 이용, 움막을 지어 피신을 시켰는데 이 사실을 왜경이 정보를 입수, 집으로 찾아와서 부인에게 신관오(申觀梧)가 집에 숨어있다는데 찾아내라고 강요하면서 곤양주재소에 끌고가 송곳으로 허벅지를 찌르는 심한 고문을 했으나 그래도 부인은 끝까지 모른다고 함구불언하여 생명을 건졌고, 동생 신관준(申寬俊)은 전사(戰死)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시신을 찾기 위하여 격전지 현장에 가서 전사자를 확인하였으나 시신의 형체를 분별할 수가 없어 여러 번 확인을 반복하는 도중에 부인이 손수 만든 버선과 단임을 보고 시신을 찾게 되었다고 하며 당시 동학혁명에 가담하여 전사한 사람이 많은데 정확한 사망날짜를 확인을 못하고 시신도 찾지 못하여 고승당산성전투 일을 기준, 매년 음력 10월 13일 밤에 일제히 제사를 지냈는데 그 명단을 열거하면 곤양면 본촌부락 신범식(申範植)의 증조부(曾祖父) 신관준(申寬俊) 곤양면 본촌부락 육재열(陸在烈)의 조부(祖父) 육상규(陸相奎) 증조부(曾祖父) 육병명(陸炳明) 부자(父子), 곤양면 와티부락 최득수(崔得守)의 조부 최기현(崔璣鉉), 대정(大正), 곤양면 대진리 김정곤(金正坤)의 부(父) 김용수(金瑢洙) 교수(敎授), 곤양어류(昆陽魚遊) 김화강(金和康)의 조부(祖父) 김성룡(金成龍 1名 錫龍) 수접주(首接主), 증조부(曾祖父) 김학두(金學斗) 접주(接主) 부자(父子) 종조부(從祖父) 김익선(金益善), 곤양어류(昆陽魚遊)의 최몽원(崔蒙元) 대정(大正) 김화준(金華俊), 김경달(金敬達), 최성준(崔聖俊), 한명선(韓明善), 김명완(金命完), 강오원(姜五元), 강몽생(姜夢生), 김차계(金且桂), 조성인(趙性仁), 최학권(崔鶴權) 등 많은 사람들이 전사하였다. 솥골 이규정(李奎井)은 곤양 대접주로써 교세확장에 심혈을 기우려 오다 관헌의 눈을 피하면서 한 많은 세상을 마쳤으며 그의 아들 영호(英鎬)는 1895년 체포되어 곤양과 진주 감옥에서 복역하다가 3년만에 가출옥 하였으나 장독으로 횡사하였다. 지금까지도 동학운동에 참여하였던 많은 사람들에 대한 거취는 일부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유족의 소재도 알 길이 없다. 당시 곤양면 대진리 어리골(魚遊洞)에서는 기력이 광대한 역사(力士) 김학두(金學斗) 접주의 지휘 아래 면내 많은 농민들이 동학혁명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특히 고승당산성 전투에 참가하여 비참한 죽음도 당하고 탈출한 사람도 집에 돌아오지 않아 유족들은 고승당산성 함락일을 기하여 음력 10월 13일에 제사를 봉행 하는 가정이 허다하며 <천도교 창건록>에 의하면 1893년에 공주와 삼례에서 동학도 수만명이 교조 신원운동을 일으키자 이곳 곤양에서도 환덕리 신충세(申忠世)의 부(父) 신금룡(申今龍) 중정(中正) 신만석(申萬石)의 조부(祖父) 신금석(申今碩) 중정(中正) 묵곡리 황태식(黃泰植) 대정(大正) 어리골 진삼성(陳三聖)의 조부 진협성(陳俠成 諱 相俠) 증조부 진석열(陳錫烈 諱 錫季) 부자(父子) 묵곡리 이호수(李鎬守)의 조부 이광로(李光璐) 본촌 진경제(陳慶濟)의 종조부 진영수(陳永秀) 외 배동엽(裵東燁), 집강(執綱), 정재용(鄭載鎔) 등이 입도하여 척왜양창의운동(斥倭洋倡義運動)에 맹활동을 하였다.   경상도 남부지역의 동학혁명운동은 진주를 중심으로 싹터 올랐으나 전라도 동학군의 절대적인 지원 아래 전개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의 역사적 배경을 갖고 있는 지역으로서 6월 이후 일본군의 경복궁 침범에 자극되어 동학군의 척왜창의(斥倭倡義)에 적극 호응했고, 더욱이 민씨 일족인 민준호의 은밀한 지원도 크게 작용했다. 이 지역에서 전개된 혁명운동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진주지역은 전라도 동학도들의 봉기에 자극되어 1894년 4월부터 일어났으며 관민을 완전히 장악 했었다. 영장 박희방에 대한 항거를 계기로 승세를 잡은 동학도들은 관아 점거라는 극한 상황을 피하면서 악질 관리배와 향반을 응징했다.(주한일본공사관리리록)에 전 진주 병사 민준호는 그들의 무리가 취합하는 것을 금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들의 기세를 도와 오늘의 화근을 초래했다고 하여 경상 우병사 민준호가 동학군에게 직ㆍ간접으로 도움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둘째로, 일본군이 경북궁을 침입하자 이를 계기로 동학도들이 내세운 척왜창의는 농민 대중 뿐만 아니라 양반 지식인과 관리나 병사들도 진주지역 특유한 역사적 항일 배경을 그대로 반영하여 거대한 힘을 형성케 했었다. 상인과 천인의 동비들을 제거하려면 먼저 반족의 동비들을 제거해야 하며 각 읍의 동비를 제거하려면 먼저 진주의 동비를 제거해야 한다고 하여 사족이나 관직 출신들도 동학에 많이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셋째로, 전라도 광양 순천지역의 영호 대접주 김인배가 하동을 점령하고 진주에 진출하는 한편 남해, 곤양, 고성, 사천지역에도 직접 지원함으로서 경남 남서부 지역의 혁명운동을 촉진하는데 직접적인 힘이 되었다. 그리고 충경대접주 임규호와 전라도 남원, 구례 등지 동학군의 지원도 이 지역 혁명운동에 이바지 했다는 점이다.   넷째로, 동학혁명운동 기간은 반년간이였으나 조선왕조의 성리학적 사회질서를 근본적으로 뒤집어 놓았다. 당시 향반 지배층은 변혁의 역사를 외면한 채 구질서를 유지하려고 갖은 발악을 다했다. 심지어 일본군 침략자를 마치 구세주로 받들었으며 심지어 자기 지역에 주둔하기를 간청하여 일제 침략을 정당화하려 하였다.   결론적으로 이 지역 동학혁명운동은 충경포를 배경으로 하는 진주의 손은석과 영호포를 배경으로 하는 하동의 여장엽에 의해 주도되었고, 일본 침약자를 물리치기 위해 목숨을 바친 투쟁은 우리들의 가슴에 길이 남게 하였다.   (자료 : 천도교 100년사, 한국사, 사천시사, 하동군지, 신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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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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