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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5. 곤양(昆陽)의 동학농민운동(東學農民運動)   갑오년(1894) 동학농민운동이 시작되던 전후, 서부경남과 곤양 상황을 살펴보면 진주를 중심으로 하동, 단성, 곤양 등지에서 수많은 인원이 동학운동에 참가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곤양 솥골 이규정(李奎井 : 합천인)은 동학의 곤양 접주로써 1893년 3월 충청도 보은 집회에 참가하는 등 포교활동에 적극적이였다. 조정에서는 서부 경남 농민 운동을 수습하기 위하여 어윤중을 선무사로 진주 지역에 파견하였는데 그가 보낸 장계(4月 3日)에는 귀거자(歸去者 : 동학운동에 참가하고 돌아온 사람), 하동(河東) 50여 명, 진주(晋州) 60여 명이며 진주삼장(晋州三壯) 사람 백락도(白樂道)가 진주 지역에 道를 전했다고 했다.   ◦1892년에 진주 삼장인 백낙도가 전라도 장수 송해용(松海龍)에게서 도를 받고 진주 중심으로 전파 함.(신인간 17호)   ◦지난달 진주 지방에서도 인근 동학당이 봉기하여 매우 불우한 상태이나 얼마 되지 않아 진정되어 백도홍을 비롯한 30여 명의 난도가 포박되어 그 후 무사하게 되었다.(1894. 6. 13 경상도내 동학당 동태에 관한 탐보)   이렇듯 소요가 계속되던 중 정부는 청국에 원군을 요청하고 일군이 불청객으로 들어오고 하니, 9월 2일 왜적토벌의 기치를 들고 재 봉기하게 되자 하동에서 광양, 순천, 곤양 등지의 동학군 수천 명이 하동을 점령하고 여세를 몰아 진주까지 입성하게 되고 진주에서 대회를 열고 기세를 돋우게 되고 9월 8일 일본군이 진주에 주둔하게 되고 일본군이 추적을 피해 곤양지역으로 옮겨 오면서 인근지역에 사동문(私洞文)을 보내 금남면 대치(당시는 곤양군 소속)로 모일 것을 촉구 함.   1) 재차사통문내용문(再次私通文內容文)   도착(到着)하는 즉시 각 리동의 리임(里任)과 동장(洞掌)들은 이 통문(通文)을 뜯어보고 민폐를 교정하기 바랍니다. 그리고 대동에서는 50명, 중동에서는 30명, 소동에서는 20명, 더 작은 동에서는 10명씩 내일 오전에 다시 일어나 대치(大峙:당시 곤양군 현 금남면 금오산 아래 한재)로 모여 주기 바랍니다. 만일 나오지 아니하거나 지체하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그 동의 리임(里任)이나 동장(洞掌)의 집을 탕진하고 그 기세를 몰아 그 다음의 동까지 화가 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알리기 위해 미리 통지하는 것이니 만일 어떠한 경우에 처할지라도 이 통문만은 한 마을에서 본 즉시 다른 마을로 전달하기 바랍니다.   아! 우리 백성들이여,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이제 14~15년간의 흉년을 거친 뒤 또 77일간 대한(大旱)을 만났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온갖 폐단이 발생하고 있으니 아! 우리 백성들이여, 어찌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갑오년 9월 초10일(주한일본공사관 기록)이라고 한 것이 사통문(私通文)의 내용이다.   진주 등지의 동학도들은 일본의 추격으로 4일만인 음 9월 11일에 하동 금오산에서 대치하게 되고 10월 23일에는 하동부근의 동학도를 격퇴하기 위해 일군 원전(遠田)중위는 2개 소대를, 후지사까 소위는 1개 소대를 인솔하여 10월 23일 부산을 출발, 27일에 하동에서 동학도를 공격하여 퇴주시켜 곤양으로 향하고 이 양부대를 지휘하기 위하여 스스끼 대위는 10월 4일 곤양에 도착하게 되고 10월 7일에 스스끼 대위는 2개 소대를 이끌고 안심동(安心洞)의 남방 금오산으로 나아가 동학당 약 4백여 명이 모여 있는 곳을 만나 1개 소대는 본도(本道)로부터 1개 소대는 산남(山南)으로부터 전진시켜 협공하여 이들을 살륙함. 이로 인해 동학군의 시체 6구, 생포 21명, 무기 등을 압수하였다고 하며, 그 후 지방민의 말에 의하면 시체는 모두 70여 구가 산에 모여 있었다고 하는데, 주한일본공사관 기록에도 재부산영사 가도증웅(加藤增雄)이 스즈끼 대위의 보고에 의거 주조선공사 이노우에에게 보고하기를, “지난 음력 10월 6일 곤양으로부터 서쪽으로 10리쯤 되는 안심촌(安心村) 남쪽 금오산에 또 다시 동학군이 집결하는 것을 발견하였답니다. 그래서 우리 군대가 세방면에서 공격 소탕하여 사망자 5명이 생기고 28명을 생포하였으며 약간의 유기품도 있었다 합니다. 또 4일 진주 백곡촌(栢谷村)에도 동도 5, 6백 명이 모여 점차 그 수가 증가하고 있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오하기문에도 경상우도 토포사 지석영이 진주 지방의 적을 무곡(茂谷)장터에서 대파하였고 또 곤양 사천지방의 적을 금오산에서 포위하여 연파하였다. 이 무렵 호남좌도의 적들이 영남우도로 넘어 오고자 하였지만 운봉(雲峯)의 박봉양(朴鳳陽)에게 막혀 팔랑재를 넘지 못하였다. 경상우도의 적은 진주에 모여 그 세력을 점점 확장 시키고 있었는데 석영이 대구에서 온 병대(兵隊)와 일본군 수백 명을 이끌고 급히 달려오다 무곡에서 동학군과 만났다. 동학군은 산을 거점으로 삼아 견고하게 지키고 있었지만 관군이 일본 총으로 사격을 가해오자 오래 버티지 못하고 사방으로 도망쳤다. 약 4백여 명의 수급을 베었다고 하였다. 이때 우리나라 총의 사정거리는 100보 정도지만 일본총의 사정거리는 4~5백보나 됨으로 인하여 동학군은 대파되었다. 석영은 또 금오산까지 추격하여 총을 발사함으로 인하여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었다고 하였다. 천도교 100년사에 의하면 경상도 진주대접주(晋州大接主) 전희순(全熙淳)은 기포하라는 통문을 받고 기력이 광대한 도인 곤양의 김학두(金學斗)와 더불어 곤양군기소에 이르러 군기감역 文모에게 사유를 말하고 군기를 달라고 하자 문모는 응하지 않았다. 이에 전대접주(全大接主)는 숯불이 가득한 화로를 들어 그의 앞에 던지고 빰을 후려치면서 이르되, “우리는 나라를 위하여 탐관오리를 제거하려고 혁명을 일으키는 것인데, 네가 만약 이 나라의 백성이 되어 우리의 뜻을 순종치 않으면 너부터 당장에 처죽이리라”하고 상위에 있는 벼루장을 집어드니 문모는 황급하여 군기고의 열쇠를 내어 주었다. 이에 군기고 문을 열고 두 사람이 한짐씩 지고 나왔다고 하면서 음력 10월 6일 이들이 덕산(德山)에 이르니 경상도 7포 도인 2만여 명이 모여 있었다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덕산으로 모여든 동학군들은 다시 단성으로 옮겼다.   한편 일본군은 10월 5일(양력 11월 2일) 고성군에 도착 대기 중인 토포사 지석영이 이끄는 관군과 합류하여 구해창(舊海倉)을 거처 10월 7일(양 11월 4일) 곤양군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이 곳에 정착한 것은 성곽도 있고 하동, 진주, 사천, 덕산 등 동서남북으로 통하는 교통중심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해창에서 포착해 온 동학군 곤양 접주인 임석준(林石俊)을 8일 정오에 성내 북쪽 장터에서 군중을 모아놓고 총살 효수(梟首)했으며 나머지 17명도 총살하였다.   동학군과의 첫 번째 전투는 하동군 진교면 안심리 뒷산인 금오산 줄기의 봉우리 시루봉에서 시작되었다. 10월 9일에 동학군이 이곳에 집결해 있음을 탐문한 일본군은 곤양에서 10일(양력 11월 5일) 새벽에 출동하여 공격하였다. 하동접주 여장협(余章恊)이 이끄는 동학군은 일본군의 하동 진출을 막기 위해 진다리(辰橋)에서 서쪽 4㎞ 떨어져 있는 안심리와 고하리 일대에 수백명의 동학군을 배치하여 놓고 있었다.(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안심리 전투에서 동학군 5명을 사살하고 28명을 생포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노획물 중에는 나팔 1쌍, 총 3자루, 큰징 1좌, 북 1좌, 도끼 1자루, 괭이 1자루, 백미 5두가 있었다 한다.(경상도관찰사장계)에는 9일 밤에 동학도 기백명이 하동 안심촌 뒤에 있는 금오산 줄기인 한 봉우리에 둔치 해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밤중이라 공격을 못하고 10일 새벽에 신철회ㆍ정인식이 이끄는 본군과 일본군이 연합격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동학군 8명을 포살하였고 본군이 21명을 생포하였다. 일본군에 생포된 자도 9명이고 이밖에 총에 맞고 도망치다 죽은 자는 이루 헤아리기 어렵다고 하였다. 지방민의 증언에 의하면 동학군은 진교, 양보, 고전면 일대에 퍼져 있었으며 안심리 뒷산 시루봉에는 이백명 정도가 진을 치고 있었다. 당시 안심리의 호수는 70여호 였으며 이 곳 동학군도 참가했으나 주로 양보면 동학도가 많았다. 시루봉에는 돌로 성을 쌓았고 나팔과 징과 북을 울리며 깃발을 날리니 몇 10리 밖에서도 듣고 볼 수 있는 장관을 이루었다. 그러나 동학군의 무기는 화숭총과 활과 돌이였으니 일본군의 신식무기를 감당치 못하였다. 일본군은 산을 완전 포위하고 공격해 한나절 만에 동학군을 격퇴시켜 동학군은 고전면 배드리 쪽으로 도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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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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