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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2. 최시형(崔時亨)의 동학대회(東學大會)   최시형은 제2세 동학(東學) 교주이다. 그의 제자 손병희(孫秉熙 : 제3세 교주)와 더불어 동학을 은밀히 전도함으로써 동학은 전국 각지에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이 동학은 사회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어 소수 특권 계급에 의한 탄압만으로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당시의 사회상을 살펴보면 척족세도에 의해 대원군이 실각(1873)된 후 왜적의 침략 청나라의 간섭 영국과 러시아의 압박 등으로 인하여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영국의 검문도 점령(1885) 등 불상사가 계속 연발하여 국위는 날로 떨어지고 있었다. 더욱이 민씨 일당에 의한 매관매직과 지방 관리에 의한 가렴주구 또한 양반들에 의한 토색질 등으로 인하여 내정은 극도로 부패되고 인민은 도탄에서 헤매게 되었다. 이에 동학교주 최시형이 크게 분개하여 고종 30년(1893) 정월에 교도들을 충청도 보은군 장내마을로 모아 동학대회를 열고 2월에는 교조 최제우의 신원(伸寃)을 상소 하였으나 조정에는 도리어 2월 27일에 동학을 금하고 그 괴수를 잡으라는 어명이 내렸다. 그러나 최시형은 ‘제폭구민’과 ‘척양척왜’를 부르짖고 3월 10일에 다시 수만 명의 교도들을 보은장내에 소집하여 산하에 석성을 쌓고 조정에 대항하였다. 이에 충청감사 조병식(趙秉式)이 여러 번 해산을 명하였으나 해산은 고사하고 날마다 수많은 교도가 운집하여 형세가 매우 위험함으로 조정에서는 어윤중(魚允中)을 양호도 어사로 파견하여 민폐시정을 약속하고 동학과 인민을 탐학한 충청감사 조병식과 그를 방조한 공주영장 윤영기(尹泳璣) 등 수명의 탐관을 처벌함으로써 보은 장내취회는 20여일 이후인 4월 2일부터 해산하였다.   이때 장내취회시 서부 경남에서도 상당한 인원이 참가했던 것으로 나타났으며 곤양에는 솥골에 사는 이규정(李奎井)이 곤양 접주로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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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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