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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5. 왜란과 곤양성   1) 진주대첩에 대한 곤양성의 의미   임난 7년 동안 곤양성과 사천성이 진주성대첩에 대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진주는 호남통로의 관문이요, 바다에서 서울 직통로로 가장 가까운 길이니 점령당한다면 적에게 군량미를 보급해 주는 결과가 된다. 장기전과 후방 보급품 수급이 가능한 것이다. 호남은 바다를 건너 온 왜적에게 있어서는 절대로 필요한 군량미 지역임으로 진주성 수비와 점령은 양측의 절대절명의 필요한 전략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곤양성과 사천성의 후원군으로 후방의 습격을 당하니 왜적들은 창원 마산으로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진주대첩이다.   2) 사천해전과 곤양군(昆陽郡) 관할(管割)의 역할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가 평양성을 점령하고, 의주(義州)까지 피난을 간 선조임금에게 오만방자한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한양, 송도, 평양성이 점령되고, 며칠 후면 우리 일본 함대가 대동강으로 들어 올 터인데 그 때는 의주에서 어디로 갈 것인가? 지금 항복하여 조선의 영토를 분할하는 것이 현명한 책략이다.”   이 편지 내용은 곤양군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 곤양군 관내인 노량목을 지나 출전한 충무공 이순신의 거북선 함대는 선진성을 점령한 왜적 선단과 해전을 벌리기 위하여 가고 있었다. 이 곳의 지리를 정탐차 나왔다가 사천 선진으로 돌아가던 왜선을 진교 앞 바다에서 발견하고 추격 격파하였다. 패퇴하여 응원군을 기다리던 경상우수사 원균도 남해 노량 목에서 만났다.   왜적 수군 중 가장 용맹한 선발대가 서해(西海)의 해로(海路)를 개척하기 위하여 이미 사천해에 들어와서 선진성을 점령하고 성채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작전계획은 육로와 함께 서해로 북상하며 호남의 곡창을 점령하고 한강과 대동강으로 전쟁물자를 수송하는 항로를 개척한다고 되어 있었기에 왜적의 괴수 소서(少西)는 큰 소리치고 평양성에서 보급선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사천 바다 위에서 선진성을 바라보니 기세등등한 왜적들은 13척의 대소전선을 배치해 놓고 육지에는 기를 꼽고 성채를 만들고 있었다. 선진성으로 부터 기세등등한 왜적을 유인해 내어 넓은 바다인 사천해(泗川海)에서 용전분투하여 승전을 거두었으니 이 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 제독은 어깨에 총탄을 맞았으나 치료도 받지 못하고 계속된 옥포ㆍ당포ㆍ당항포 전투로 이어져 몇 년을 두고 고생했던 사실이 <난중일기> 곳곳에 기록돼 있다.   3) 최초의 거북선이 보인 전선(戰船)의 위력   사천해전에서 거북선 전투로 최초의<사천해전대승첩>보고가 의주(義州)에 피난 중인 선조 임금께 올라갔다. 우리들의 조정에서는 기쁨과 사기가 충천했으나 왜적들은 그렇게 믿었던 제일 해군이 괴멸된 것이다. 거북선이 연전연승으로 제해권(制海權)을 잡은 지도 모르고 평양성에서 왜장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는 보급선 오기만을 기다렸다. 왜적의 괴수 고니시 유끼나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앞서와 같은 방자한 서장(書狀)을 의주(義州)의 선조대왕에게 보내고 평양성에서 기다리고만 있었다.   이때에 만약 사천해전(泗川海戰) 대승첩(大勝捷)이 없었다면 서해로 올라가려는 왜의 선단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끔찍한 일이다. 곤양성(昆陽城)과 사천성(泗川城)이 사천만 해역을 지키고 있었기에 왜적은 호남으로 발을 붙히지 못하였고, 진주성 역시 호위성인 곤양성과 사천성이 있어 후방기습으로 왜적의 전세를 막아 주었기에 진주성대첩으로 진주성을 수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때에는 응원성 역할로 진주성대첩을 이루어 호남통로를 막았던 곤양성과 사천성이 무너졌고 주위에는 응원군을 보낼 성들이 없었던 것이다. 이 나라를 위해 장렬하게 전사한 6만 관민의 넋을 기리기 위해 진주성지는 성역화 되어 현재와 같이 복원되었다.   4) 권율의 군법집행   권율 도원수가 곤양군(昆陽郡) 성(城) 안에 도착하여 원균 통제사를 호출 대령시켰다. 권율 도원수는 육전(陸戰)이 위급한데 해전(海戰)이 출전하지 않으니 일본 보급선은 자유로이 남해안을 왕래하게 되었다는 죄책을 물어 원균 통제사에게 여러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곤장형을 가하게 되어 볼기를 맞았다. 한산도로 가면 반드시 출전하겠다고 권율 도원수에게 다짐하고 돌아가는 원균은 이것이 순전히 이순신의 농간으로 매를 맞는 것이라고 푸념하고 충무공에게 앙심을 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원균은 조정에서 거제ㆍ진해ㆍ부산포에 있는 왜선을 공격하라는 출전명령을 내렸으나 듣지 않고 육군이 진해ㆍ마산을 쳐오면 연합작전으로 나가겠다고만 주장하고 출전하지 않았다. 이순신도 왜장 가등청정이 오는 날을 알려 주어도 나가자 않았던 것을 이유로 삼아 모함했으니, 이순신을 모함한 것과는 모순된 처사를 후임으로 온 원균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때에 남해안 지역인 곤양ㆍ사천ㆍ선진ㆍ진주ㆍ남해ㆍ하동 등 장사진 안에 있는 백성의 피해는 형언할 수 없었던 것이다. 민가를 뒤져 곡식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탈하고 가축을 도살하고 민가에 불 지르고 아녀자까지 살상한 천인공노(天人共怒)할 짓들을 왜군들은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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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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