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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4. 왜란과 곤양의 참상 1) 왜란시의 참화   첫째, 전란을 겪은 백성들의 참화이다. 서기 1597년(정유년 7월 21일(양력 9월 2일)) <경자> 조에 보면 이순신 장군이 곤양 노량에 이르니, 군인들과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상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고, 우후 이의득(李義得)이 찾아 왔거늘 패했던 정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되, “대장 원균(元均)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났다. 원균 휘하의 여러 장수들도 재빨리 뭍으로 도망가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인데 입으로는 형용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뜯어 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이런 백성들의 참담한 소리들을 듣고 거제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함께 이야기했다. 밤 세 시(四更)가 되어도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그 바람에 눈병이 생겼다.   장수들이 백성을 지키기 위하여 죽을 각오로 싸워야 함에도 전투가 벌어지자말자 도망을 가 백성들이 겪었을 참화를 초래한 원균의 죄는 크다. 전투에 패배함으로 인하여 왜적들이 통상적으로 행하는 재물약탈, 노역, 린치, 부녀자 겁탈, 살인, 공포 등의 아비규환 참상을 곤양지역의 백성들은 고스란히 당하였을 것이다.   둘째, 민심의 이반 형상이다. 조정과 대장에 대한 믿음이 없으니 백성을 모아 병사를 조련시키려하여도 호응하여 주는 사람들이 없었다. 병사를 모으려 하면 달아나 숨을 꾀만 내는 지경에 이르렀다. 민심이 모아져야 세력을 힘을 키울 수 있는데 민심이 조정을 떠나 흩어져 그러하지 못하였다는 통탄스러운 정황을 토로하고 있다. 나중에 이순신의 이름으로 모병을 하자 백성들이 호응을 한 점을 보면 지휘관에 대한 백성들의 신뢰감이 전쟁에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 있다.   2) 왜란 이후의 비극   임진ㆍ정유 양 왜란을 당하여 백성이 핍박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백성들을 위하여 혼신의 정렬로 선정을 베풀어야 할 군수가 오히려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였다는 비극적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이조실록에는 군수가 학정을 펴다가 문책당하는 기록들이 여러 곳에 있으나 여기서는 몇건만 기록한다.   첫째, 김충수 군수에 관한 실록의 기록이다. “… 곤양군수 김충수는 인물이 용렬하여 정사를 하리(下吏)에게 맡기므로 아전이 부리는 농간의 폐단을 백성들이 그대로 받고 있습니다. 또 본가(本家)의 물건을 수송하면서 관중(官中)에서 쓸 물건이라고 핑계 대고는 민간에서 값을 거두는데 방납(防納)하는 사람처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하루에도 관(官)에 둘 수가 없으니 파직을 명하소서”하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선조실록> 권89, 선조 30년 6월 29일 무자조 1597년)   둘째, 이유칙(李惟則) 군수에 관한 실록의 기록이다. 사간원(司諫院)이 아뢰기를 “…… 곤양군수 이유칙은 본래 교활하고 거친 사람으로 전일(前日)에 수령(守令)이 되었을 때에 욕심이 많고 사나워서 백성을 수탈하다가 패하였는데도 여전히 징계하지 않았습니다. 본직에 제수되자 온 고을의 백성을 끌어 모아 놓고 12세 이상은 모조리 몰아내어 생선과 소금 장사를 시키고 군량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전일보다 세금을 많이 받는 바람에 온 경내의 사람들이 거의 다 흩어졌습니다. 그리고 일본에서 쇄환(刷還)된 사람 중 <부모의 고향을 못 잊어서> 옛 땅에 와서 사는 사람을 <해상에서 그물질을 하게 하여>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한 나머지 혹 스스로 목을 찔러 죽는 사람도 있으므로 듣는 사람들은 모두 측은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습니다. 사판(仕板)에서 삭제하라 명하소서……”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권141, 광해 11년 6월 22일 임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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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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