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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3. 왜란시의 곤양 1) 전략적 요충지   1592년(선조 25년) 임진년 4월에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왜군은 동래에 상륙한지 20일 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1개월 만에 함경도까지 진격하여 한반도는 치욕과 참상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의분에 차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의병 및 관군들의 활약으로 왜군은 김해, 고성, 창원 등 경상도 남부지역에서 연패하게 되었다. 전세가 이렇게 되자 왜군은 경상우도의 조선군 주력부대가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전세 만회를 위해 이를 일거에 함락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왜군은 진주성을 공격하기 위해 등원랑(藤元郞)ㆍ평조신(平調信) 등을 주축으로 부산ㆍ동래ㆍ김해지역에 포진하고 있던 정예병 3만 여명을 동원하여 1592년 10월 5일 진주성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제1차 진주성 전투는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6일간 계속되었다. 한편 진주성에는 김시민 목사의 본성 군사 3,700명과 곤양군수 이광악의 군사 100명 등 도합 3,800명의 군사가 있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정병이라기보다는 새로 모집한 장정들이었다. 그러나 김시민 장군은 진주성민들의 필사적인 단결과 곽재우· 최강· 이달 등 각처 의병들의 열렬한 성원에 고무되어 죽기를 각오하고 진주성을 사수키로 결심한 후 화살하나 탄환 한발이라도 낭비하지 말 것을 지시하는 등 만반의 전투 준비를 갖추었다. 이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는 진주성에 3만 여명에 달하는 왜의 대군이 진주성(晋州城)을 포위하여 성을 공격하였지만 김시민 장군 및 이광악 곤양군수는 불과 3,800명의 병력으로 7일 간에 걸친 치열한 공방전 끝에 적을 격퇴하는 전공을 세웠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제1차 진주성 전투이다. 이 진주성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호남의 곡창지대를 지킬 수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호남곡창지대를 점령하여 군량미 제공의 교두보를 확보하여 장기전으로 한반도를 점령하고 나아가 명나라를 침공하려 하였던 계획을 가졌는데, 이런 도요토미의 계획이 진주성싸움에서 원천적으로 좌절되게 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우리나라가 반대한 명ㆍ일간의 협상이 결렬되자 곧바로 정유년에 재침공을 하였는데 정유재란의 첫 공략지는 진주성이었다. 특히 곤양은 해안의 전략지역임과 동시에 영남에서 호남으로 향하는 길목이었기에 임진왜란 당시 더욱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따라서 진주성 싸움에 곤양군수 및 곤양지역의 사람들이 초미의 관심을 갖고 대응하지 않을 수가 없었고, 다른 지역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진주성 싸움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되었다. 2) 곤양의 군사력   해변 전략요충지로서의 곤양의 군사적 준비성과 곤양병력의 용감성에 대한 일단의 흔적을 <선조실록>과 이순신의 <난중일기>에서 엿볼 수 있다.   먼저 <선조실록>의 기록이다. 임진년 4월 13일 왜란이 발발된 2개월 후 <선조실록> 27권 25년 임진 6월 병진(丙辰)조에 나타난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본도의 순찰사는 서울로 올라갔고, 지휘관(병사)에게는 병사가 없고, 수사는 영문(營門)을 빼앗겼다. 남아 있는 고을이라야 겨우 거창ㆍ안음ㆍ함양ㆍ산음ㆍ단성ㆍ진주ㆍ하동ㆍ곤양ㆍ사천ㆍ합천ㆍ삼가 등 10여 관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백성들은 모두 깊은 산으로 들어가고 없어서 빈성(空城)만이 남아 있다. 비록 수령과 가장(假將)이 있다고 하여도 명령이 시행되지 않고, 군사를 모아(調兵) 지원하여 주는 일도 없으니 얼마가지 않아서 이 모든 고을이 적의 수중으로 떨어질 것이다.\"   이런 내용을 미루어 보건대, 곤양ㆍ사천ㆍ진주 등 경상 우도와 10여 고을에는 미미하나마 일정 부분의 병사력이 준비되어 있었다고 보여 진다. 제1차 진주성 싸움에 이광악 군수가 100명의 군사를 지휘하여 참여하였다는 것을 통하여서도 곤양의 군사력은 어느 정도 준비되어 있었다고 보여 진다.   책임자였던 이순신 장군에게 지휘 상황을 보고하기 위하여 많은 지역 책임자들이 보고하러 방문하였지만, 곤양군수였던 이광악ㆍ이극일 군수는 언제나 이순신 장군의 지근에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3) 곤양의 싸움   곤양의 전투는 인근 사천ㆍ남해의 전투와 연계되어 일어났다. 당시의 각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는 임진왜란 연구, <사천시지>, <진주사>등 여러 기록물에 상세히 나타나 있으므로 전문을 기재하는 것은 생략하고, 여기서는 곤양 및 곤양군수의 지휘 아래 곤양병사가 투입된 싸움만을 모아 간략하게 정리한다.   (1) 임진 8월의 전투. 진주판관 김시민이 전병사 조대곤, 곤양군수 이광악, 사천현감 정득렬 등과 더불어 정병 1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강을 건너서 진주 사천 경계인 십수교(十水橋)에서 왜적의 선발대를 격파하여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2) 서기 1592년(임진년) 5월 29일 새벽 제2차 해전에 출전하면서 새로 만든 거북선(龜船)을 포함한 전라좌수영소속 정예함선 23척이 노량으로 이동하여 경상우도 수군 전함 3척과 합류하고 동쪽으로 항진하였다. 항진 도중 곤양에서 사천쪽으로 항해하는 선박 1척을 발견하고 전부장(前部長) 이순신(李純信:防踏僉使), 한후장(捍後將) 기효근(奇孝謹:南海縣令)이 추격하여 화공(火攻)으로 소각하였다.   (3) 서기 1597년 8월 5일 왜군의 좌군은 곤양을 거쳐 하동으로 진출하였다.   (4) 서기 1598년 9월 중로제독 동일원(董一元)이 이끄는 조명연합군이 왜군격퇴를 위하여 진주로 들어왔다. 왜군 10,000여 명은 시마즈의 지휘아래 곤양성과 고성성을 양 날개로 삼아 진주 남강에서 최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후방으로는 망진, 영춘, 사천 성채를 통양창포 신채의 전진방어기지로 삼고 있었다. 동일원군은 9월 20일 야간기습전투로 왜군을 공격하였고 왜군은 곤양과 사천 쪽으로 도망을 갔다. 22일에는 곤양성을 탈환하였다.   (5) 동일원 군은 우변사 정기룡 장군 휘하 보병과 기마군(步騎) 3천명과 제독 자신의 병사 4천명으로 사천성을 포위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6) 서기 1598년 사천신채 선진전투에서 중로의 동일원군은 그 병력의 태반이 전사하고, 식량 무기 등 많은 물자를 빼앗겼다. 동일원 군들은 왜군이 쏜 총에 놀라 도망을 쳤지만, 동일원의 게첩(揭帖)에 대하여 <선조실록>권105 선조 31년 10월 무진조의 비판적 기록이 있다. 당시 일본의 기록도 전승의 결과를 과장한 면이 많다. 정기룡 장군이 제일 먼저 공격하여 제일 나중에 나왔는데도 중로군의 명나라 장군들은 정기룡 장군에게 패인의 책임을 전가하려고 획책한 단면을 보더라도 당시 명나라의 장수들의 태도와 그 연합작전이 어떠하였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7) 서기 1598년 11월 18일 밤 곤양 노량 앞바다에서 왜군 구원 부대의 길목을 차단하였다. 11월 19일 노량해전의 대승리로 왜군은 11월 20일 퇴각하고, 이순신은 전사하였다. 이순신은 스스로 왜군의 총탄을 맞았으며(疑自殺說 : 전쟁의 막바지인데도 평소에 습관적으로 입고 있던 갑옷을 벗어버리고 평상시복으로 갈아입었으며, 왜군의 눈에 잘 띄는 지휘북 앞에서 지휘하여 왜군의 화살 및 조총의 공격을 유도하였고, 당시 조정의 당파싸움 및 선조의 우유부단함과 귀엷음이 전쟁에 이기고도 역적으로 몰릴 것을 이순신은 예견하고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하였을 것이라는 설), 7년(1592년~1598년)에 걸친 악몽의 왜란은 끝이 났다.

4) 난중일기에 나타난 곤양과 충무공 행로지 비 (1) 난중일기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는 조선시대 성웅 이순신(李舜臣) 장군이 전쟁 중에 7년간 기록한 일기로 일반적으로 <난중일기>로 알려져 있다. 총 7책 205장으로 되어 있으며 국보 제76호이다. 1592년(선조 25년, 壬辰)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달인 5월 1일부터 전사하기 전달인 1598년 10월 7일(선조 32년, 戊戌)까지 기록되어 있다. 본래 이 일기에는 어떤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후 1795년(정조 19년)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하면서 편찬자가 편의상 ‘난중일기’라는 이름을 붙여 전서 권5부터 권8에 걸쳐서 이 일기를 수록한 뒤로, 사람들은 ‘난중일기’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순신의 친필 초고와 전서에 수록된 일기를 비교해보면 상당한 차이가 발견되고 있다. 그것은 친필 초고를 정자로 베껴 판각할 때 글의 내용을 많이 생략한 때문인 듯하다. 또 <이충무공전서>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이 현재 남아 있는 친필 초고에는 언제 잃어버렸는지 없어지고 보이지 않는 부분이 상당수 있다. 예컨대 1592년 정월 1일부터 4월 22일까지의 부분, 1595년 1년 동안의 부분, 1598년 10월 8일부터 12일까지의 부분 등이다. 따라서 <난중일기>의 전모를 알기 위해서는 친필 초고를 표준으로 삼고, 초고의 망실로 인해 <이충무공전서>에만 수록되어 있는 부분은 그것으로서 보충할 수밖에 없다.   전 7책 중   제1책은「임진일기(壬辰日記)」로 27매(1592.5.1∼1592.5.4, 1592.5.29∼1592.6.10, 1592.8.24 ∼ 1592.8.28, 1593.2.1 ∼ 1593.3.22),   제2책은 「계사일기(癸巳日記)」로 30매(1593.5.1 ∼ 1593.9.15)   제3책은 「갑오일기(甲午日記)」로 52매(1594.1.28 ∼ 1594.11.18)   제4책은 「병신일기(丙申日記)」로 41매(1596.1.1 ∼ 1596.10.11)   제5책은 「정유일기(丁酉日記)」로 27매(1597.4.1 ∼ 1597.10.28)   제6책은 「정유무술일기(丁酉戊戌記)」로 20매(1597.8.4 ∼ 1598.1.4)   제7책은 「무술일기(戊戌日記)」로 8매(1598.9.15 ∼ 1598.10.7)로 되어 있다.   그 밖에 장계(狀啓)ㆍ등본(謄本), 별책 부록 끝에 1598년 11월 8일부터 17일까지 최후 10일간의 일기가 1장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제5책과 제6책의 「정유일기」 중에 8월 4일부터 10월 8일까지의 일기는 중복되어 있다. 무슨 이유로 다시 썼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앞 책의 간지(干支)가 잘못 적혀 있는 점과 내용에서 뒤의 것이 앞의 것보다 더 많이 적힌 것으로 보아, 시간적 여유를 타서 기억을 더듬어 다시 한 번 더 적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일기의 주요 내용은 엄격한 진중 생활과 국정에 관한 솔직한 감회, 전투 후의 비망록과 수군 통제에 관한 비책, 시취(時趣)의 일상생활 등이 실려 있다. 이 밖에 가족ㆍ친지ㆍ부하ㆍ장졸ㆍ내외 요인들의 내왕, 부하들에 대한 상벌, 충성과 강개의 기사, 전황의 보고, 장계 및 서간문의 초록 등이 실려 있어, 임진왜란의 연구에 없어서는 안 될 귀중한 자료이다. 군더더기 수식어를 가급적 생략하고 사실과 장군의 심정만을 간략하고 정확하게 기록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부조리한 조정의 움직임에 통분을 하면서도 임금과 백성을 위한 충정으로 스스로 모든 고통을 감내하며 전란의 와중에서 담담하게 적어 내려간 난중일기는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귀중한 사료이다. 하늘은 영웅에게 고통과 헌신, 마지막 살점 터지는 죽음만 요구하고 영예와 권세는 주지 않은 것 같다. 이런 이순신의 일생에 대하여 서애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이렇게 한탄하고 있다. “이순신은 재주는 있었으나 운수가 없어서 백가지의 경륜 가운데서 한 가지도 뜻대로 베풀지 못하고 죽었다. 아아 애석한 일이로다!”   󰡔난중일기󰡕에 곤양군수 및 곤양이라는 지역명은 자주 등장하지만 곤양군의 실정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언급된 바는 없다. 다만 서기 1597년 정유년 7월 21일(양력 9월 2일) 경자조에 백성들의 농사일에 관한 기록이 있고, 곤양의 노량백성들이 원균에 대하여 비통하게 원망하는 대목은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곤양군수가 곤양의 일들을 상세하게 말하였을 것이지만 진중 위난 시에 백성들의 일상적인 일은 기록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제1책은 「임진일기(壬辰日記」에 나타난 내용이다.   먼저 1592년 5월 29일에 경상도 해역으로 2차 출전해 곤양, 사천해전에서 승리. 사천해전에서 처음 거북선으로 적함 13척을 격파했으나 왼쪽 어깨에 총탄을 맞아 중상을 입은 기록이다. 왜적이 당포(唐浦)에 이르자 이순신은 원균과 합세, 곤양(昆陽)에서 격파하고 사천 앞바다로 추적해 무찔렀다.   1592년 임진 5월 29일(양력 7월 8일) <무자>   우수사(이억기)가 오지 않으므로 홀로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새벽에 출항하여 곧장 노량에 이르니,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은 미리 약속한 곳에 와서 만나 그와 함께 상의했다. 왜적이 머물러 있는 곳을 물으니, “왜적들은 지금 사천선창에 있다”고 한다. 바로 거기로 가 보았더니 왜놈들은 벌써 뭍으로 올라가서 산 위에 진을 치고 배는 그 산 아래에 줄지어 매어 놓고 항전 태세가 아주 굳건하였다. 나는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일제히 달려들며 화살을 비 퍼붓듯이 쏘고, 각종 총포들을 우레 같이 쏘아대니, 적들이 무서워서 물러나는데, 화살을 맞은 자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고, 왜적의 머리를 벤 것만도 많지만, 이 싸움에 군관 나대용(羅大用)이 탄환에 맞았고, 나도 왼쪽 어깨 위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하였으나, 중상은 아니었다. 활꾼과 격군 중에서 탄환을 맞은 사람이 또한 많았다. 적선 열세 척을 불 태워버리고 물러나 머물렀다.   “중상은 아니었다”고 적고 있지만 이 상처는 후일 이순신을 무척이나 괴롭혔다. 서애 류성룡(西涯 柳成龍)에게 보낸 친필 편지에서 “어깨뼈를 상한데다가 또 언제나 갑옷을 입고 있었으므로 상한 곳이 헐어서 진물이 늘 흐르고 있습니다. 밤낮없이 뽕나무 잿물과 바닷물로 씻어내지만 아직 완쾌되지 못하여 민망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처럼 무거운 중상임에도 불구하고 당포(唐浦: 6월 2일), 당항포(唐項浦: 6월 5~6일), 율포(栗浦: 6월 7일) 해전에서 연승을 거두었다. 이순신 장군의 정신과 국가관을 알 수가 있다.(편집위원주)

  1592년 임진 7월 초6일(양력 8월 12일) <임술>   장계에서 함대를 거느리고 일시에 출항하여 곤양과 남해의 경계인 노량에 도착하니, 경상우수사가 파손된 것을 수리한 전선 일곱 척을 거느리고 그 곳에 머물고 있었다. 그래서 바다 가운데서 같이 만나 재삼 약속하고 진주 땅 창신도에 이르자, 날이 저물어 밤을 지냈다.   제2책은 「계사일기(癸巳日記)」에 담긴 내용이다.   1593년 계사 9월 초2일(양력 9월 26일) <계축> 맑다.   장계의 초안을 잡아서 내려 줬다. 경상우후 이의득(李義得)ㆍ 여념(李汝恬) 등이 와서 만났다. 어두울 녘에 이영남(李英男)이 찾아왔다. 또 전하기를, “병마사 선거이(宣居怡)가 곤양에서 공로를 세웠다고 한 것과 남해현령(기효근)이 도체찰사에게 꾸중을 들었는데 공손치 못하다는 이유로 불려 간 것이다”라고 말했다. 가소롭다. 기효근(奇孝謹)의 형편없는 짓이야 이미 알고 있는 터이다.   제3책은 「갑오일기(甲午日記)」의 내용이다.   1594년 갑오 4월 21일(양력 6월 9일) <기사> 비가 오락가락 했다.   혼자 봉창 아래 앉아 있어도 저녁내 아무도 오지 않았다. 방답 첨사가 충청수사가 되어 중기(重記:사무인계장부)를 수정해야 할 일이 있어서 돌아가야겠다고 했다. 저녁에 김성숙(金惺叔)과 곤양의 이광악(李光岳)이 와서 만났다. 저물녘에 흥양 현감이 들어 왔다. 본영 탐후선이 돌아 왔는데, 어머니께서 평안하시다고 했다. 참으로 다행이다.   4월 23일(양력 6월 11일) <신미> 맑다.   아침에 순천부사(권준)ㆍ흥양 현감(배흥립)이 왔다. 저녁나절에 곤양군수 이광악(李光岳)이 술을 가지고 왔다. 장흥부사도 왔다. 임치 첨사(홍견)도 같이 왔다. 곤양군수 이광악이 몹시 취하여 술 취한 소리를 마구 떠들어 대니 우습다. 나도 잠깐 취했다.   4월 26일(양력 6월 14일) <갑술> 맑다.   병세의 통증이 극히 심하여 거의 인사불성이 되었다. 곤양군수가 아뢰고 돌아갔다.   5월 16일(양력 7월 3일) <계사> 흐리고 가랑비가 내렸다.   저녁에는 큰 비가 밤새도록 내려 지붕이 새어서 마른 데가 없다. 각 배에 탄 사람들의 거처가 괴로울 것이 매우 염려된다. 곤양군수(이광악)가 편지를 보내고, 아울러 사명당 유정이 적진 가운데로 왕래하면서 문답한 초기(草記:각 관청에서 업무상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을 사실만 간단히 적어 올리던 글)를 보내와서 읽어 보았더니, 분통함을 이길 길이 없다.   7월 7일(양력 8월 22일) <계미> 저녁에 비가 뿌렸다.   충청수사는 그 어머니의 병환이 심하여 오지 못하겠다고 보고하였다. 우수사와 순천부사ㆍ사도첨사ㆍ가리포첨사ㆍ발포만호ㆍ녹도만호가 함께 활쏘기를 하였다. 이영남(李英男)이 배를 거느리고 올 일로 인해 곤양으로 가겠다고 작별하고 돌아갔다. 사로 잡혔다가 돌아온 고성 보인(保人)을 문초했다. 보성 군수가 왔다.   8월 16일(양력 9월 29일) <신유> 맑다.   새벽에 출항하여 소비포에 이르러 정박했다. 아침밥을 먹은 뒤에 돛을 올려서 사천 선창(船滄:사천시 용현면 선진리)에 이르니, 기직남(奇直男)이 곤양군수(이광악)와 함께 와 있었다. 그대로 머물러 잤다.   8월 17일(양력 9월 30일) <임술> 흐리다가 저물녘에 비가 내렸다.   원수(권율)가 오전에 사천으로 와서 군관을 보내어 이야기 하자고 하므로 곤양군수의 말을 빌려 타고 원수가 머무르고 있는 사천(泗川) 현감의 사처로 갔다. 교서(敎書)에 숙배를 한 뒤에 공사간의 인사를 마치고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 하니 오해가 많이 풀리는 빛이었다. (권율 장군이) 원 수사를 몹시 책망하니 원 수사는 머리를 들지 못하였다. 가소로웠다. 가지고 간 술을 마시자고 청하여 8순배를 돌렸다. 원 수사가 잔 뜩 취하여 파했다. 숙소로 돌아 왔더니 박종남(朴宗男)과 윤담(尹潭)이 찾아왔다.   8월 18일(양력 10월 1일) <계해>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식사를 한 뒤에 원 수사가 청하므로 나아가 이야기했다. 또 조촐한 술잔치를 벌였는데 잔뜩 취해서 아뢰고 돌아왔다. 경상수사 원균(元均)은 취해 일어나지도 못하고 드러누워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만 곤양군수(이광악)ㆍ거제현령(안위)ㆍ소비포권관(이영남) 등과 함께 배를 돌려 삼천포 앞에 이르러 잤다.   8월 21일(양력 10월 4일) <병인> 맑다.   외가의 제삿날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곤양군수ㆍ사도첨사ㆍ 마량첨사ㆍ남도만호ㆍ영등포만호ㆍ회령포만호ㆍ소비포권관가 아울러 왔다. 양정언(梁廷彦)이 와서 봤다.   8월 22일(양력 10월 5일) <정묘> 맑다.   나라제삿날(成宗貞顯王后 尹氏)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경상 우후가 와서 봤다. 낙안군수ㆍ사도첨사도 왔다가 갔다. 저녁에 곤양군수ㆍ거제현령ㆍ소비포권관ㆍ영등포만호가 와서 이야기하고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8월 23일(양력 10월 6일) <무진> 맑다.   아침에 공문 초안을 잡았다. 밥을 먹은 뒤에 활터 정자로 옮겨 앉았다. 공문을 적어 보냈다. 그리고 나서 활을 쏘았다. 바람이 몹시 험악하게 불었다. 장흥부사ㆍ녹도만호가 같이 와서 어울렸다. 저물 무렵에 곤양군수와 웅천현감ㆍ영등포만호ㆍ거제현령ㆍ소비 포권관도 왔다. 밤 8시경에 헤어져 돌아갔다.

  8월 25일(양력 10월 8일) <경오> 맑다.   아침에 곤양군수ㆍ소비포권관을 불러서 같이 아침밥을 먹었다. 사도첨사가 휴가를 받아 돌아 갔다. 9월 초7일에 돌아오도록 일러 보냈다. 현덕린(玄德麟)이 제 집으로 돌아갔다. 신천기(申天紀)도 곡식을 바칠 일로 돌아갔다. 저녁나절에 홍양 현감이 돌아왔다. 활터정자로 내려가 활 여섯 순을 쏘았다. 정원명(鄭元明)이 들어왔다고 했다.   8월 그믐날(양력 10월 13일) <을해> 맑고 바람조차 없다.   해남현감 현즙(玄楫)이 와서 만났다. 저녁나절에 우수사(이억기) 및 장흥부사(황세득)가 와서 만났다. 저물 무렵 충청우후(원유남)ㆍ웅천현감(이운룡)ㆍ거제현령(안위)ㆍ소비포권관(이영남)도 왔다. 허정은(許廷誾)도 왔다. 이 날 아침 탐후선이 들어왔는데, 아내의 병이 몹시 위독하다고 했다. 벌써 죽고 사는 것이 결딴이 났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다른 일은 생각이 미칠 수 없다. 그러나 아들 셋ㆍ딸 하나가 어떻게 살아갈꼬! 마음이 쓰리고 아프구나. 김양간(金良幹)이 서울에서 영의정의 편지와 심충겸(沈忠謙:병조판서)의 편지를 이곳에 가지고 왔다. 분개한 뜻이 많이 적혀 있다고 했다. 원균 수사의 하는 일이 매우 해괴하다. 나더러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다고 했다고 하니, (참으로 어이가 없어) 천년을 두고 통탄할 일이다. 곤양군수가 병이 나서 다시 돌아가는데, 만나보지 못하고 보냈으니 너무 섭섭하다. 밤 열시쯤부터 마음이 어지럽고 심란하여 잠을 이루지 못했다.   10월 초6일(양력 11월 17일) <경술> 맑다.   일찍 선봉을 장문포 적의 소굴로 보내었더니, 왜놈들이 패문(牌文)을 써서 땅에 꽂았는데, 그 글은, “일본은 명나라와 화친을 의논할 것이니, 서로 싸울 것이 없다.”는 것이다. 왜적 한 명이 칠천도(漆川島) 산기슭에 와서 투항하고자 하므로, 곤양군수가 불러 내려서 배에 싣고 왔다. 물어보니, 영등포에 주둔한 왜적이었다. 흉도로 진을 옮겼다.   10월 10일(양력 11월 21일) <갑인> 맑다.   아침에 나가 장계초고를 꺼내어 수정했다. 박자윤(朴子胤)과 곤양군수는 그대로 머물고 떠나지 않겠다고 하였으며, 흥양현감ㆍ보성군수ㆍ장흥부사는 아뢰고 돌아갔다. 이 날 밤 두 가지 상서로운 꿈을 꾸었다. 울(蔚)과 변존서(卞存緖)ㆍ유헌(有憲) 및 정립(廷立) 등이 본영으로 돌아갔다   다음은 을미년(1595) 6월의 기록이다   6월 초8일(양력 7월 14일) <기유> 비가 내렸다.   몸이 좀 나은 것 같다. 저녁나절에 세 조방장이 와서 보고, 곤양군수는 자기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 급히 집으로 돌아갔다고 전했다. 매우 한탄스럽고 섭섭하였다.   11월 초2일(양력 12월 2일) <경오> 맑다.   곤양군수 이수일(李守一)이 와서 봤다.   다음은 병신년(1596)의 기록이다.   1월 18일(양력 2월 15일) <을유> 맑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군복을 마름질했다. 저녁나절에 곤양군수(이수일)ㆍ사천현감(기직남)이 왔다가 취해서 갔다. 동래현감(정광좌)이 달려와서 보고하는데, “왜놈들이 많이 반역하는 눈치가 보이고, 명나라의 심유격(沈遊擊:沈惟敬)이 소서행장(小西行長)과 함께 1월 16일에 먼저 일본으로 갔다.”고 했다.   1월 19일(양력 2월 16일) <병술> 맑고 또 따뜻하였다.   저녁나절에 나가 공무를 봤다. 사도첨사와 여도만호가 왔다. 우후ㆍ곤양군수도 왔다. 경상수사가 와서 우후를 불러서 왔다. 곤양군수가 술을 차려서 내므로 조용히 이야기했다. 부산에 투입하였던 네 명이 와서 전하기를, “심유경(沈惟敬)과 소서행장(小西行長)ㆍ현소(玄蘇)ㆍ사택정성(寺澤正成)ㆍ소서비(小西飛:內藤 如安)와 함께 1월 16일 새벽에 바다를 건너갔다”는 소식이다. 그래서 양식 서 말을 주어 보냈다. 이 날 저녁에 박자방(朴自邦)이 서(徐) 순찰사가 진에 온다는 말로 인해 여러 가지 물건을 가지러 본영으로 갔다. 오늘 메주를 쑤었다.   1월 21일(양력 2월 18일) <무자> 맑다.   아침에 나가 공무를 봤다. 체찰사에게 보낼 순천(順天) 관계 공문을 작성했다. 밥을 먹은 뒤에 미조항 첨사 및 흥양 현감이 찾아왔기에 술을 대접하여서 보냈다. 미조항 첨사는 휴가를 신청했다. 저녁나절에 대청으로 나가니 사도첨사ㆍ여도만호ㆍ사천현감ㆍ광양현감ㆍ곡포권관이 와서 보고 돌아갔다. 곤양군수도 왔다. 활 열 순을 쏘았다.   6월 23일(양력 7월 18일) <기미> 밤 두시쯤부터 종일 비가 내렸다.   남해현령과 이야기했다. 저녁나절에 남해현령은 경상수사처소에 갔다. 조방장 및 충청우후ㆍ여도만호ㆍ사도첨사 등을 불러 남해에서 가져온 술과 고기를 먹였다. 곤양군수 이극일(李克一)도 와서 봤다. 저녁에 남해현감이 경상수사 있는 곳으로부터 왔다. 술에 취하여 인사불성이다. 하동현감도 왔는데 본현(本縣)으로 다시 보냈다.   다음은 정유년(1597)의 기록이다.

난중일기(7.21)

  7월 8일(양력 8월 20일) <정해> 맑다.   아침에 이방(李芳)이 왔기에 밥을 먹여서 보냈다. 그에게서 들으니, 원수가 구례에서 이미 곤양에 이르렀다고 했다. 저녁나절에 집주인 이어해(李漁海)와 최태보(崔台輔)가 와서 봤다. 변덕수(卞德壽)가 또 왔다. 저녁에 송대립(宋大立)ㆍ류홍(柳洪)ㆍ박영남(朴永男)이 왔다. 송과 류 두 사람은 밤이 깊어서야 돌아갔다.   7월 21일(양력 9월 2일) <경술> 맑다.   난중일기(7.21)   아침 일찍 출발하여 곤양군에 이르렀더니, 곤양군수 이천추(李天樞)가 고을에 있고, 백성들도 많이 본업에 힘쓰고 있고, 혹 올 벼를 추수하기도 하고, 혹 밀보리밭을 갈기도 하였다. 낮에 점심을 먹은 뒤에 노량에 이르니, 거제현령 안위(安衛)· 영등포만호 조계종(趙繼宗) 등 10여명의 사람들이 와서 통곡하였으며, 피해 나온 군사와 백성들이 울부짖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상수사(배설)는 도망가 보이지 않고, 우후 이의득(李義得)이 찾아 왔거늘 싸움에서 지게 된 상황을 물었더니, 사람들이 모두 울면서 말하기를, “대장 원균(元均)이 적을 보고 먼저 뭍으로 달아났다. 여러 장수들도 원균을 따라 기를 쓰고 뭍으로 달아나서 이런 극한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대장의 잘못을 말한 것인데 입으로는 형용할 수가 없고 그 살점이라도 씹어 먹고 싶다고들 하였다. 거제의 배 위에서 자면서 거제현령 안위(安衛)와 함께 새벽 2시까지 이야기했다. 밤 세 시(四更)가 되어도 조금도 눈을 붙이지 못했다. 그 바람에 눈병이 생겼다.

난중일기(7.22)

  7월 22일(양력 9월 3일) <신해> 맑다.   아침에 경상수사 배설(裵楔)이 와서 보고, 원균(元均)의 패망하던 일을 많이 말했다. 식사를 한 뒤에 남해현감 박대남(朴大男)이 있는 곳에 이르니, 박대남의 병세가 거의 구할 수 없게 되었다. 전투말을 서로 바꿀 일을 다시 이야기했다. 종 평세(平世)와 군사 한 명을 데리고 오겠다고 했다. 오후에 곤양에 이르니, 몸이 불편해서 그대로 잤다.   7월 23일(양력 9월 4일) (임인) 비가오다 개었다 하였다.   아침에 노량에서부터 만들던 서류를 작성하여 송대립에게 주어 멀리 원수부(元帥府)로 보내고 뒤따라 떠나 곤양(昆陽) 십오리원(十五里院: 현 곤명면 봉계리 원전)에 이르니 배백기(裵伯起) 부인이 먼저 도착해 있었다. 말에서 내려 잠깐 쉬고 있다가, 진주 운곡(雲谷:초고에 屈洞이라고 썼다가 운곡이라고 고쳐씀. 청룡리) 전일 숙박하던 곳에서 잤다. 어두워지면서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밤새도록 그치지 아니했다. 백기도 와서 잤다.

행로지 비(충무공)

(2) 이충무공 백의종군 행로지 비(李忠武公 百衣從軍 行路地 碑) 행로지 비(충무공) ㆍ장소 : 곤양면 사무소 입구 충무공께선 임진왜란 중 몇 번 곤양을 거쳐 간 것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이 행로지비는 모함으로 모든 관직이 삭탈된 상태로 권율 도원수 아래에서 백의종군하던 중 원균이 왜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군졸 수명(9명)과 곤양을 거쳐(1598.7.21~23) 현지에서 상황을 파악하고 다시 돌아가던 중 곤양에서 일박한 기록들을 기념하기 위하여 사천문화원에서 세운 비이다.

5) 서애에게 보낸 편지에 나타난 곤양의 실정 다음 후일 이순신이 서애 류성룡에게 쓴 편지의 내용이다.   장마가 걷히자 가뭄이 들고 더위가 혹심한데, 찾아뵙지 못하였지만 안녕히 잘 지내셨습니까?   전에 아팠던 학질과 이질이 이제는 어떠하십니까? 저도 걱정되어 우려하고 걱정하고 있지만 그 아픔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낮이나 밤이나 사모하는 마음 그지없습니다.   전에 두 번이나 안부 편지를 받아 곧 뵈오려 하였지만, 또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여 임금에게 충성하는 일을 건의코자 했습니다만, 지난번 전투에 조심하지 않고 먼저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나갔다가 적의 탄환을 맞아, 비록 죽을 만큼 다치지는 않았으나, 그 뒤로도 연일 갑옷을 입고 서로 싸우고 있으니, 다친 상처가 심하여 어깨뼈까지 깊이 도져 흔 데에 궂은 물이 줄줄 흘러 아직도 옷을 입을 수 없으며, 뽕나무 잿물과 바닷물로 연일 씻으며, 온갖 약으로 치료하지만, 아직 별로 차도가 없습니다. 또 활시위를 당길 수 없어 무척 죄스럽습니다. 임금에게 충성하고자 하는 일이 생각뿐이고 몸은 이렇게 병이 들어 북쪽을 바라보며 길이 탄식하면서 오직 눈물이 흐를 뿐입니다.   군사를 움직이는 시기는 언제인지 정해졌습니까?   강여울은 극히 얕아져서 적을 도우고, 적에게 힘을 더해 주어, 적이 촛불 옮겨 붙듯 빨리 이동하여 침범하니, 신령과 하느님이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 것이 이렇게 극에 이르렀습니다. 의분을 품어도 할 말이 없고, 화가 나 쓸개가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소속 변방의 장수중에서 녹도만호ㆍ방답첨사가 있고, 수령 중에서는 흥양현감· 순천부사· 낙안군수가 있으나 비단 이 지방의 사람들이 모두 무너져 흩어지려는 마음을 품고 있고, 우도의 각 고을과 포구도 혹 스스로 무너질 곳이 있으니, 아직 적의 얼굴조차 보지 못했으며, 오히려 나아진 것이 이와 같습니다.   요즘 이 지방의 민심을 보니, 지난번에 군사를 돌린 뒤로 군의 사정은 근심하고 고통스러워하며 원망스러워 한번 연해 지방에 징병한다는 소식을 듣기만 하여도 모두 달아 날 꾀만 품고 있으며, 혹 말을 하는 자가 있어서 물길을 따라 가서 적을 토벌하고 자리를 옮겨가며 싸우러 깊이 들어간다면 되돌아 올 수 없다고 하고, 또 경상도에 인접한 땅에서 남김없이 징발 한다면 이 도는 왜적에게 넘겨주게 되었고, 방어하는 사람도 없고, 부모처자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 합니다. 민심이 이러하니 무엇으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으니 어떻게 지휘해야 할지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군사를 출전시킬 기한에도 불구하고, 한번 휴가를 얻는다면 민심은 반드시 이렇게까지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정예 수군을 얻고 잡색군중에 자원하는 사람을 모아 이들로 하여금 훈련을 하여 힘을 길러도 휴가는 가게 해야 할 것입니다. 8월 초에 거느리고서 이 지방에서 나아가도록 지휘를 이어받아 죽음으로써 결전하니, 군량과 군기가 거의 경상도에서 다 썼으니, 다시 나가 싸우고 또 옮길 걱정만 난감합니다. 이 도로 하여금 미리 헤아려 보수를 주니 우러러 봅니다. 이 도로 하여금 전쟁에 임하여서 부끄러움을 녹이려 합니다.   순천부사가 죄인을 잡아올 사람을 보내어 힘을 다하여 잡아 왔으나 와야 할 사람은 매우 드물다고 하니, 통분하기 그지없습니다. 각 포구의 보고의 내용도 이와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기한을 넉넉히 잡아 의리 때문에 새벽까지 기다렸다가 이를 잡아 왔습니다. 아랫쪽 삼도(경상ㆍ전라ㆍ충청)에는 겨우 온전한 것은 이 도가 대충 그렇고, 만약 이 도를 잃는다면 회복할 길이 없어집니다. 낮이나 밤이나 울다 지쳐 목이 메입니다. 더욱 더 이 도를 잃게 되어 잘못 하지 않게 하도록 회복할 꾀를 오래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종사(宗社)를 도로 찾는다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6) 이순신에 관한 전설   곤양성(현재의 곤양초등학교)에 곤양의 백성들을 모아 군복을 입히고 싱싱한 갈치를 대나무 꼬챙이에 끼워 아침햇살에 비추이게 하여 무수한 칼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일본군 척후병을 교란시켜 곤양성 안에 무수한 군대가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의 진입을 막았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정기룡 장군 공적비

7) 임진왜란과 곤양군의 충신ㆍ열사들   ① 정기룡(鄭起龍) 장군   임진왜란시 활약한 곤양의 인물로는 당연히 정기룡 장군(1562~1622년)을 들 수 있다.   다음은 정기룡 장군에 관련된 내용이다.   (1) 정기룡 일대기   정기룡 장군 공적비   정기룡 장군은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국란을 이겨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진양 정씨(晋陽 鄭氏)이며 곤양 정씨의 시조로 자는 경운(景雲), 호는 매헌(梅軒)이다. 곤양(昆陽)에서 태어나 선조(宣組) 13년(1580)에 향시(鄕試)에 합격하였고 1586년 무과에 급제한 후 왕명에 따라 기룡(起龍)으로 이름을 고쳤다. 1590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 兵馬節度使) 신립(申砬)의 휘하에 있다가 훈련원 봉사가 되었다.   서기 1592년 임진란이 일어나자 돌격장으로 우방어사 조경(趙儆)의 막하에 종군하여 4월 23일 거창의 신창전투에서 왜군을 격파한 후 금산 싸움에서 포로가 된 조경을 구출하고 곤양 수성장이 되어 왜군의 호남 지방 진출을 막았다. 유병 별장을 거쳐서 상주 판관이 되어 격전 끝에 상주를 탈환하고 경주성 탈환 등에 공을 세워 회령 부사, 상주 목사, 경상목사가 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정기룡장군을 모신 경모재

  서기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토왜대장(討倭大將)이 되어 고령(高靈)에서 적장을 생포하였고, 계속해서 성주, 합천, 초계, 의령 등 여러 성을 탈환하여,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승진하고 이어 경주, 울산을 수복하였다. 1598년 명나라 군대의 총병직을 대행하여 경상도 방면의 잔적을 소탕하였다. 임진란 초에 거창에서 싸웠고, 정유재란 때도 사천에서 무주를 향하던 왜군을 추격해서 거창까지 갔고, 이때 부 총병 이녕(李寧)과 거창에서 회동하여 적을 함양으로 쫓았다. 무술년 신원에서의 율원 싸움으로 왜적과의 마지막 전투도 거창에서 치루었다.   서기 1601년 임진왜란이 끝나자 경상도방어사(防御使)가 되어 임무를 수행하고, 익년에 김해, 밀양 부사를 거쳐 중도방어사에 오르고 그 후 상호군으로 승진되고, 1617년에는 다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서 삼도 통제사 겸 경상우도 수군절도사에 올라, 1622년 통영 진중(陳中)에 작고하였다. 상주의 충열사(忠烈祠)에 제향 되고 시호는 충의공(忠毅公)이다.   금남면 한재에 경모재가 건립되어 있고 유물도 보관, 전시하고 있다.

② 禦侮將軍趙公殷福祀壇碑 嗚呼此故通訓大夫禦侮將軍諱殷福之祀壇也.公系出咸安世襲珪組爲東方著族.德谷先生諱承肅其六代祖也.高祖諱珥禮賓寺正曾祖諱連顓隱不仕祖諱淑孫僉中樞考諱興守號潛齋早遊南冥曺先生門學行雅望聞于世妣晋陽河氏贈參判緯天之女也.公早有氣節膽f略威勇絶倫讀書之暇每習弓馬慷愾有大志及當宣廟壬辰倭寇大擧列郡瓦解公時在晋陽奮然有敵愾之志與弟秀往見昆陽鄭起龍將軍擧義卽日從者數百人遂與之討賊晋昆兩邑賴以得全及聞賊犯晋城往見通判金時敏追擊十水橋斬獲甚多賊軍大驚夜遁固城昌原郡諸捿奏特除禦侮將軍因與時敏起龍合軍靭兵爲公先鋒前進遇賊金山斬數十級賊皆奔散旣而砲聲大發伏兵爭起公獨力戰不退勢窮遇害卽八月十七日距其生己亥爲五十四時夫人鄭氏與二子避亂于薇谷山中聞變卽嘔血自盡長男廷硏爲賊所殺次男碩奮義殺賊復父兄讎何其壯哉何其烈哉臣死於忠子死於孝妻死於烈數日之內一門三綱往牒所穻覿也. 嗚呼公以草野一布衣能猶辨大義於兵革之中敵王所愾其奇功危烈可謂與日星幷明宜有列聖朝藵彰之典而有司者竟不聞可慨也.已亦有待時而然歟李洗馬度中狀亦可徵信於百世下也.大亂之餘一門可謂盡滅略而穉孫流落殊鄕公之內外墓亦幷失香火莫憑尋求屢百年竟莫得爲子孫之遺恨謂如何哉.今春宗議齊發祭之如上塚儀以伸追遠報本之誠不得已據古去祧爲壇之禮封土設壇於子孫世居之先庄附以夫人歲一祭盖義起處變之道而亦不失其正也.且立碑壇前期永久勿朁顧今人紀大壞不爲翔走者幾希而此日此義曷不爲裨補世程也.歟使宗老鏞洙旻濟歷數百里請記其陰余雖不文講世誼篤不敢辭謹書此如右 檀紀 4299年 丙午 3月 日 河東 鄭道鉉 撰

어모장군 사단비

  어모장군 조은복 사단비   어모장군 사단비   오호라! 이곳은 고 통훈대부 어모장군 휘 은복(殷福)의 제단비이다. 공의 관향은 함안이니 벼슬이 대대로 이어져서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벌족이다. 덕곡(德谷) 선생 휘는 승숙(承肅)이며 공의 6대조이시다. 고조의 휘는 이(珥)이고 예빈시정의 벼슬을 하셨다. 증조의 휘는 연전(連顓)이고, 벼슬은 없었다. 할아버지의 휘는 숙손(淑孫)이니 첨중추의 벼슬을 하였고, 아버지의 휘는 흥수(興守)요 호는 잠재(潛齋)이니 남명(南冥)선생 밑에서 수업하여 학식과 인망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어머니는 진양 하씨이니 참판 위천(緯天)의 딸이다. 공은 기질이 있고, 용맹도 있었다. 독서하는 틈틈이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히면서 장차 이룰 큰 뜻을 품었다. 선조대왕 임진년에 왜적이 크게 쳐들어왔는데 영남의 모든 고을들이 마치 기와지붕 허물어지듯 무너져 위급한 지경에 처하여졌다. 공은 이때 진주에 있다가 시국을 수습할 뜻을 품고 분연히 일어나 아우 수(秀)와 함께 곤양에 있는 정기룡 장군을 만나보고 의병을 일으켜 국난을 타개하고자 하였다. 이때 공을 따라 모인 의병이 수 백명이었다. 드디어 적병을 토벌하니 진주와 곤양이 안전하게 되었다. 적병이 진주를 침범한다는 소문을 듣고 진주통판 김시민 장군을 도와서 십수교에서 적병을 맞아 용전분투하여 적병을 크게 무찌르니 적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고 야밤에 도망쳐 갔다. 고성ㆍ창원을 수복하였다는 첩서가 조정(朝廷)에 알려져서 어모장군(禦侮將軍)으로 제수 받았다. 이 기회를 맞이하여 김시민, 정기룡 장군과 함께 군사를 징발하여 적을 토벌하는 싸움에 나섰다. 공이 선봉장이 되어 금산에 있는 왜적을 물리치니 왜적은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왜적의 뒤를 추격하여 들어가는데 문득 사방에서 총소리가 일어났고 공의 근처에 복명이 숨어 있었다. 궁지에 빠진 공은 사력을 다하여 싸웠지만 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이때가 8월 17일이다. 기해(己亥)년에 출생하여 54세를 일기로 순절(殉節)하셨다. 이때 공의 부인 정씨는 두 아들과 함께 미곡산(薇谷山)에 피난 가 있다가 이 소식을 듣자 피를 토하며 자진(自盡)하였다. 장남 정연(廷硏)은 왜적에게 살해되고, 차남 석(碩)은 분기 충전하여 칼을 빼어 왜적을 찔러 죽이고 아버지와 형님의 원수를 갚았다. 참으로 장하고 열열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버지는 나라에 충성을 다하면서 죽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효도를 다하면서 죽고, 아내는 남편에게 열성을 바치면서 죽었다. 불과 며칠 동안에 한 가문에서 삼강(三綱)을 세웠다는 것은 지난 역사에서도 보기 드문 사건이다. 오호라! 공은 베옷을 입고 초야에 묻혀 지내는 선비였지만 병란을 당하여 대의(大義)를 이루었으니 그 공로(功勞)와 충열(忠烈)이 하늘의 태양과 별처럼 밝고 명랑하게 빛난다. 당연히 국가에서 포창(襃彰)이 있어야 마땅한 일이지만 윗 전(上司)에 알리지 않았으니 통탄할 일이다. 그 때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세마(洗馬) 이도중(李度中)이 지은 글이 백세의 증명이 될 것이다. 나라의 큰 난리가 스쳐 지나간 뒤 조씨 일문이 멸망한 상태에서 어린 손자가 타향에 떨어져 고생하는 황망 중에 조상들의 묘소도 잃어버리고, 제삿날도 지키지 못한 지가 수 백년이 되었으니 그 자손의 서린 한이 얼마만큼 되겠는가? 이번 봄에 종중에서 의논한 결과 부득이 고대에 단(壇)을 모아 제사하는 예(禮)를 본받아 그 자손이 살았던 인근 지역에 토총(土塚)을 모으고 부인과 함께 처음으로 첫 제사를 지내는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역시 옛날부터 전해 내려오는 묘 앞에 제사 지내는 형식을 본받아 성의를 다하였다. 물론 제를 지내는 예의의 모습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변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도와 정신은 흔들림 없이 변하지 않는 바른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단 앞에 비석을 세워 오래도록 전하여질 것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지금 사람들 사이의 기강이 무너지고, 사람들의 마음이 금수(禽獸)로 떨어지는 시대의 형상에 처하여 있는데 이제부터 이러한 행사들이 향리의 미풍양속을 바로 잡는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조씨 문중의 장로인 용수(鏞洙), 민제(旻濟)가 수 백리 길을 마다 않고 나에게 와서 글을 지어 주기를 요청하니 내가 비록 글 짓는 재주는 없지만 그 뜻이 매우 아름다우므로 사양하지 못하고 삼가 이상과 같이 글을 적는다.   하동의 정도현이 삼가 글을 짓다.

오봉선생 유허비

③ 통정대부 지중추부사 오봉 정선생 유허비문(通政大夫知中樞府事鰲峯鄭先生遺墟碑文) ㆍ소재지 : 하동군 금남면 대치 [碑文] 오봉선생 유허비 나라에 충하고 어버이에게 효하기란 말은 쉽지만 행하기는 어려우며 그 보다 한평생 자기 몸을 깨끗이 가지기가 더 어려운데 이 같이 어려운 일을 능히 쉽게 행한이가 계셨으니 高麗 兵部侍郞殷烈公의 후손이요 晋陽을 본관으로 한 鄭大壽 선생이시다 선생의 字는 榮老요, 부친은 副護軍 弘斗 모친은 慶州李氏縣監擎柱의 따님으로 中宗 三九년 甲辰 서기 一五四四년에 태어나 일찍 晋陽郡 大坪面 馬洞에서 자라며 천성이 인자하여 정성껏 어버이를 섬기고 덕으로써 남과 사귀어 매양 칭송을 받았었다. 청년시절에 이르러서는 灘叟 李廷慶 선생의 학통을 이어받아 사나이 세상에 나서 뜻과 의기로 살아야 하는 것을 주장한 것을 四十九세에 임진란이 일어나자 때마침 灘叟의 손자인 廣平君 李光岳 선생이 昆陽郡守로 와 있다가 널리 의병을 모집하므로 선생은 그에게로 달려가 모든 계획을 세우고 왜적을 대항하여 참획이 많았으므로 적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군대가 되었었다. 그때 적들이 晋州를 침공하자 牧使 金時敏 장군이 외로이 성을 지키므로 招諭使 金誠一이 모든 고을군사를 晋州로 보낼 적에 李光岳은 金時敏을 도와 晋州에서 접전하고 先生은 固城에서 싸우더니 맏아들 以諴이 선봉장이 되어 용전하다가 전사하고 적군은 점점 더 많아지는 대신 우리 군사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先生은 부득이 가족들을 이끌고 靑松으로 들어가 난을 피했다. 五十五세 때 임진란이 끝난 뒤에 처자들을 데리고 金鰲山 밑으로 옮겨와 영주할 곳을 정하니 이곳은 선영이 계시기 때문이요, 그로부터 스스로 號하되 ‘鰲峯’이라 했으며 忠武公 승전지인 露梁바다를 내다보면서 뜻과 의기를 기름으로써 낙을 삼다가 仁祖 元年癸亥 서기 一六二三년에 조용히 세상을 여의니 향년은 八十이었고 泗川郡 昆明面 龍鳳山銅谷 기슭에 장례모셨다. 부인은 晋陽柳氏로 贈叅議琇의 따님이요 다섯아들을 두었는데 長男은 以諴으로 순국했었고 二男은 以誡로 贈中樞府事요 三男은 以誧요 四男은 以誠이요 五男은 以諶으로 號는 慕軒이요 학문과 선행으로써 이름이 들렸으며 사위는 姜希稷이었고 以誡는 希伯ㆍ希玄ㆍ希俠ㆍ孝立ㆍ任僑 등 五男을 以誧는 源瀛ㆍ愛立ㆍ彦立등 三男을 以諶은 有僑ㆍ希僑ㆍ時僑ㆍ仁僑등 四男을 각각 두었다. 충효를 겸전하고 지조를 지켜 깨끗이 살았기에 하늘의 축복을 받아 八十 고령을 누렸고 자손 번창하여 오늘에 이르렀거니와 선생의 유적지에 비를 세우는 것은 한갓 가문을 위함이 아니라 이 고장사람들에게 충효의 길을 밝히려 함에 참뜻이 있는 것이다. 光復三一년 乙卯 서기 一九七五년 四월 鷺山 李殷相 짓고 紹軒 鄭道準 쓰다.

신당 하공헌 선생 유적비

④ 신당 하공헌 선생 유적비문(新塘 河公獻 先生 遺蹟碑文) ◦소재지 : 진주시 가호 신당 하공헌 선생 유적비 신당(新塘) 하공헌 선생(河公獻 先生)은 진양(晋陽) 하씨(河氏) 사직공(司直公)의 17세 손(孫)이며, 세종대왕(世宗大王)때 사간원(司諫院)과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신 하결(河潔)의 5세손이시다. 신당(新塘)은 선생의 호(號)이며, 휘(諱)는 공헌(公獻)이고 자(字)는 희가(希可)이시다. 신당(新塘)은 1554년 지금의 산청군 시천면에서 공조참의(工曹參議) 휘(諱) 한(澣)의 다섯 아드님 중 둘째 아들로 태어 나셨다. 세분은 후사(後嗣)가 없으시고, 선생(先生)과 아우님이신 휘(諱) 공효(公孝)와 두 분의 후예(後裔)들이 대(代)를 이어 가호문중(佳湖門中)과 태동문중(台洞門中)을 이루고 있다. 신당 선생(新塘 先生)은 어린시설 총명하여 책읽기를 즐겨하시고, 성장하면서 주자(朱子)의 성리학(性理學)에 심취하여 사구(思究)가 깊으셨다. 평소에 사친지효(事親至孝)하셨고, 형제간(兄弟間)에 우애(友愛)가 각별하셨다. 친상(親喪)을 당하여서는 다섯 형제가 일실동거(一室同居)로 여묘종상(廬墓終喪)하시는 모범을 보이시는 등 강굉(姜肱)의 효성(孝誠)과 사마광(司馬光)의 우애(友愛)에 비교(比較)될 만큼 손색없는 가정화목(家庭和睦)이 돈돈하였다. 선조(宣祖) 25년 왜구(倭寇)가 우리나라를 침공하여 왔을 때 선천적(先天的)으로 의협심(義俠心)이 강(强)하신 선생(先生)께서 인근 고을에 제시(提示)한 격문(檄文)의 내용은 ‘충(忠)과 신(信)으로서 갑주(甲冑)를 가다듬고, 예(禮)와 의(義)로서 간(干)과 노(櫓)를 들어 이 한 몸 나라를 지키는 방패로써 이 생명(生命) 바칠 것을 다짐하는 깃발을 높이 드노라’라고 하셨다. 선생은 직접(直接) 갑옷을 입으시고, 가솔(家率)과 인근(隣近) 청장년(靑壯年) 그리고 가용(家傭) 등 100여인을 인솔(引率)하여 진주성(晋州城)에 뛰어 들어 삼절사(三節士)와 함께 도이(島夷)에게 항전(抗戰)하였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성(城)이 함락되자 장렬(壯烈)히 순절(殉節)하시면서 충성(忠誠)어린 순절시(殉節詩)를 남겨 후세(後世)에 귀감(龜鑑)이 되게 하였다. “성스러운 나라의 은혜를 두터이 입었으니, 작은 고을에 엎드려 살아갈지언정 인의를 저버릴 수 있으랴, 하찮은 물고기도 의로움을 판별할 능력이 있나니, 비록 한낱 서생일망정 어찌 이 한몸 나라에 바치지 않을 수 있으랴”라고 읊으셨다. 난리가 평정되면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신 선생은 불귀(不歸)의 고혼(孤魂)이 되어 아내와 두 아들을 피난시켰던 이 곳 삼봉산(三峯山) 기슭에 초혼(招魂)으로 안장(安葬)되고 후손(後孫)들은 세세년년(歲歲年年) 향화(香火)를 받들고 있다. 선생의 두분 아드님 중 장남(長男) 휘(諱) 맹(艋)은 일녀무남(一女無男)하고, 둘째인 휘(諱) 의(艤)는 삼남삼녀(三男三女)를 두었는데 그 후예가 대(代)를 이어 4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 300여호의 가호문중(佳湖門中)을 이루고 신당선생(新塘 先生)의 덕행(德行)을 추모(追慕)하면서 사회각계(社會 各界)에서 봉사(奉仕)하고 있다. 선생의 충혼(忠魂)은 지금 충청남도(忠淸南道) 보령시(保寧市)에 소재(所在)한 임란공신호국사(壬亂功臣護國祠)의 호국제단(護國祭壇)에 봉안(奉安)되어 계시는데 이는 진양하씨 가문(晋陽河氏 家門)에 큰 자랑이라 하겠다. 1997년 10월 일 金海後人 金榮鎭 삼가 글을 짓고 密城後人 孫源模 삼가 글을 쓰고 新塘公 門中 삼가 세움 ⑤ 임진왜란시 활동한 분들 가운데 곤양후손 왜란시 백성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무수한 분들이 목숨을 던졌을 것이나 일일이 고증할 길은 없다. 숭고한 호국정신으로 살신성인한 무명의 열사ㆍ의사ㆍ병사들이 무수하겠지만 과거의 기록을 찾아내지 못하여 한 분 한 분 밝혀내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다만 여기서는 왜란시 활동한 분들의 후손이 가진 족보에 실린 내용을 소개하는 데 그친다. 소개 순서는 가나다 순이고 괄호안의 휘가 임진 정유왜란시 활동한 분들이시다. 상세한 내용은 문중 성씨편을 참고하고, 이 분들에 대하여 더 구체적 정황을 알고자 하면 각 문중에 문의하는 것이 효율적일 것이다. 우티 강태수(11세 휘 연(演)), 동천 고봉일(9세 휘 맹영(孟英), 10세 휘 경명(敬命)), 환덕 김봉상(26세 휘 은휘(殷輝)), 상정 김이수(8세 휘 극복(克福)), 신촌 김평수(10세 휘 치수(致水)), 흥사 문청일(22세 휘 귀생(貴生)), 수동 박갑호(12세 휘 사현(嗣賢)), 검정 서삼포(11세 휘 수립(壽立)), 환덕 송재현(11세 기(琦)), 본촌 신인식(20세 휘 백철(伯喆)), 가화 윤창호(20세 휘 정양(廷揚)), 성내 윤수안(22세 휘 사복(思復) 23세 휘 혜(蕙)), 흥사리 정주수(13세 휘 대수(大壽 ) 이함(以諴)), 대진 조복래( 17세 휘 종도(宗道)), 석문 조종수(17세 휘 종도(宗道)), 삼동 최남일(19세 휘 인관(仁寬)), 대진 추갑신(10세 휘 수경(水鏡)), 가호 하석규(17세 휘 공헌(公獻)), 흥사 황수덕(11세 휘 경헌(景憲), 12세 휘 예일(藝一)), 안도 황윤길(9세 휘 덕린(得麟))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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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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