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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2. 임진왜란과 곤양의 지정학적 위상   곤양은 한반도 남부의 중심축에 위치하고 있다. 해안에 접하여 있어서 왜구의 침입이 우려되었던 지역이며, 우산(남산)의 봉수대는 바로 그러한 침략과 노략질을 보고하는 해안의 첫 첩보 보고처였다. 남해안은 고려시대 때부터 왜구의 침입이 잦아 900여 회에 조선건국 이후 태종 년대에는 년 평균 3.5회의 침입이 있었다. 세종 년대에 와서 대마도의 정벌, 위엄과 회유를 통한 정책의 효과로 침략횟수가 년 평균 1.4회로 줄어들었다. 왜구는 주로 식량과 생필품을 노리며 약탈을 일삼았는데, 특히 곤양ㆍ사천만은 배를 통한 접근이 용이할 뿐만 아니라 서울로 이송하는 다양한 조세 물품 및 제민창의 제민곡 등이 있어서 왜구의 좋은 표적이 되는 지역이었다. 즉 곤양은 해변연안의 경계방어지역으로서의 기능을 할 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산 물품 및 조세품의 집결지 및 운반지로서의 위상을 아울러 갖추고 있었기에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었다.   이런 군사적 경제적 위상으로 말미암아 세종대왕은 세종 2년에 이 지역을 곤남군으로 승격하여, 세종 3년에 곤양성을 축조하였다. 또한 자신의 어태와 단종의 태실을 이 지역에 둠으로써 이 지역이 중앙정부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지역이며, 중앙정부의 고위관료들을 태실을 감독한다는 명분으로 이 지역에 빈번하게 출입하게 함으로써 왜구들이 함부로 이 지역을 넘보지 못하게 하려는 정책 의도도 드러내었다. 세종조의 이러한 국방정책 및 여타 다양한 제도의 개선으로 말미암아 왜구의 침략이 줄어들고 사회도 어느 정도 안정되어 오랫동안 평화가 유지되는 태평성대의 기틀이 갖추어졌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율배반적으로 조정의 권력내부에서는 정권장악을 위한 권력투쟁의 음모가 내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이러한 권력투쟁의 내부적 균열은 자연히 국방문제에 소홀하게 되었고, 백성의 삶은 뒤로 제쳐두게 되었으며, 급기야 일본의 정세를 직접 살피고 온 통신사의 보고서조차 현지의 정확한 실태를 전달하기보다는 조정당파의 이해관계에 따라 엇갈리게 보고되는 비극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러한 중앙정부인 조정의 불합리한 상황들로 인하여 해안지방의 군사적 경제적 요충지인 곤양은 저절로 전란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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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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