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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1. 임진왜란 개요   임진왜란의 본질적 상황은 첫째 칼과 무력수단을 휘두르며 권력투쟁으로 점철된 일본의 상황, 둘째 성리학적 풍토위에서 시(詩)와 말을 매개로 한 조선의 당파적 정쟁상황, 즉 칼과 붓의 격돌에서 칼이 붓을 꺾을려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셋째, 조선의 절박한 생존전쟁에 대하여 명나라의 패권주의적 태도에서 나온 화전(和戰) 양면전략 구사태도를 들 수 있다.   먼저 일본의 정치적 상황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서기 1590(庚寅)년 일본을 재패하여 100여 년간 계속되어 온 내란을 수습하고 통일 국가를 수립하였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많은 반대자들이 건재하며 활동하고 있었고, 따라서 자신에 대한 불만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여야 할 절박한 정치적 필요가 있었다. 동시에 그에게는 대륙을 동경하는 섬나라 사람들의 독특한 열등감에 뿌리를 둔 대륙에 대한 침략적 야심도 만만찮게 내재되어 있었다. 이런 이유들로 그는 조선과 명나라에 대한 침략을 시작하였다.   다음 조선의 상황이다. 당시 조선은 세종이후 오랜 세월동안 평화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런 오랜 평화 속에서 당시의 지배계층은 당파를 지어 서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에만 골몰하였지만 백성의 안위나 외침은 관심 밖이었다. 더욱이 나라 바깥의 상황변화에 대한 관심 즉 외교문제에는 거의 소홀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성리학의 발달로 무형의 성(性)과 리(理)에 대한 수준은 상당한 수준에 올랐으나, 실사구시의 실용적인 일들에는 소홀하였다. 또한 이민족에 대한 지나친 우월감으로 이민족들이 국토의 변방에서만 다소의 소란을 일으킬 따름이지 그들이 전 국토를 유린할 것이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국방력의 확보, 외침에 대비한 방벽의 구축 등에 관한 실질적 기반을 확보하지 못하였다. 이이의 십만양병설도 이런 배경에서 무시당하였다. 당시 지배계층인 양반계급의 당파싸움은 급기야 일본 현지에 파견된 통신사의 보고내용조차 다르게 보고되는 결과를 보였다. 즉 1590년 3월 조선정부에서는 황윤길(黃允吉)을 정사(正使), 김성일(金誠一)을 부사(副使), 허성(許筬)을 종사관(從事官)으로 한 통신사 일행을 파견하였고 이들은 이듬해 정월 일본의 답서를 가지고 귀국하였다. 일본의 답서에는 종래의 외교관례에 따르지 않는 무례한 구절과 정명가도(征明假道)를 뜻하는 글이 있어 침략의 의도가 분명하였으나 1591년 3월 이들 사신이 복명하는 자리에서 정사 황윤길(서인)은 왜가 반드시 침략할 것이라고 한 데 반해 부사 김성일(동인)은 왜가 침범할 동정이 없다는 상반된 보고로 당파적인 엇갈림과 함께 조정의 의견도 통일되지 못하였다. 결국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동인인 김성일의 일본침략불가설이 채택되고 국방을 소홀히 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명나라의 입장이다. 명나라는 패권적 우월의식으로 조선이나 왜에 대하여 등거리 외교전략을 구사하였다. 선조의 파천이후 원군을 요청하자 명나라 조정에서 파병을 결정하여 명나라 원군으로 온 이여송의 고압적 태도, 명ㆍ일간의 강화회의에 임하는 심유경의 기본 인식, 왜의 뇌물에 대한 명나라 관료의 습벽 등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명나라 관료들의 협상에 임하는 마음의 바탕에는 조선의 생존이라든지, 국가적 자존심에 관한 명분 등에는 아무런 관심조차 없었다. 명나라의 입장에서는 오로지 두 변방 국가의 분쟁에 힘센 중재자의 입장에서 강국의 지위를 확보하려는 실리추구의 의도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시대적 상황에서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이렇게 5년간 끌어온 회담이 결렬되자 정유재란이 재발하였다.   먼저 임진년의 침략이다. 당시의 일본의 병사는 일본 국내의 잔류병력과 쓰시마 등지의 주둔군 등 일본 침략군의 총병력은 약 16만 6천여 명이었다. 약 17만의 병력을 3군으로 나누어 침략해 왔다. 제1군은 고니시 유끼나가(小西行長)와 소오(宗義智)가 이끄는 군대로 병력은 18,700여 명, 전선은 700여 척이었다. 4월 13일 부산 앞바다에 모습을 드러내고, 4월 14일 부산첨사(釜山僉使) 정발(鄭撥)이 이끄는 1,000여 명의 병사가 지키는 부산진성(釜山鎭城)을 함락시킨 뒤, 이어 서평포, 다대포를 함락하고, 4월 15일에는 동래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이 지키는 동래성을 함락시켰다. 제1군은 부산과 동래를 함락시키고 중로(中路)로 동래-양산(梁山)-청도(淸道)-대구(大邱)-인동(仁同)-선산(善山)-상주(尙州)-조령(鳥嶺)-충주(忠州)-여주(驪州)-양근(楊根)-용진(龍津)나루-경성동로(京城東路)로 침입하였다.   제2군은 가또오 기요마사(加藤淸正)와 나베시마(鍋島直茂)가 이끄는 군대로 병력은 22,800여 명이었고, 4월 18일 부산포에 상륙하였다. 좌로(左路)로 동래-언양(彦陽)-경주(慶州)-영천(永川)-안동(安東)-신녕(新寧)-군위(軍威)-용궁(龍宮)-조령-충주-죽산(竹山)-용인(龍仁)-한강으로 침략하였다.   제3군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와 오오토모(大又吉統)가 이끄는 군대로 병력은 11,000여 명이었고, 4월 19일 낙동강 하구의 죽도(竹島)에 상륙하였다. 우로(右路)로 죽도(竹島)-김해(金海)-성주(星州)-무계(茂溪)-지례(知禮)-등산(登山)-추풍령(秋風嶺)-영동(永同)-청주(淸州)-경기도의 3로로 나뉘어 서울을 향하여 북상하였다. 제4군은 모리 요시나리(毛利吉成政)와 시마즈(島津義弘)가 이끄는 군대로 병력은 14,000여 명이었고, 김해에서 제3군과 합쳐서 북상하였다. 이어 제5군 25,000여 명, 제6군 15,000여 명, 제7군 30,000여 명, 제8군 10,000여 명, 제9군 11,000여 명의 후속부대도 부산포에 상륙하여 점령지후방 수비 및 후발부대로 침공대열에 합류하였다. 또 구오니 요시다카(九鬼嘉隆)와 도오도오 다카도라(藤堂高虎)가 이끄는 수군 9,000여 명은 부산포를 거점으로 해상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침략전쟁의 와중에 나타난 조선반도 내에서의 비참한 참화 및 의인, 기인, 열사, 영웅들의 이야기 등은 다른 역사연구물 내지 전해오는 이야기들에서 무수히 거론되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1596년(선조 29년) 9월 수년을 끌어 온 명ㆍ일 양국간의 화의 교섭이 깨어지자 도요토미는 재침명령을 내렸다. 이에 일본군은 다음해(1597) 1월, 가토오 고니시 등을 선봉으로 하여 재차 쳐들어 왔다. 3월 중순부터 왜의 대군이 바다를 건너 침구하기 시작하니 그들의 총병력은 14만 1,500여 명에 이르렀고, 그들의 수군도 전번처럼 강화되었다. 그러나 이번의 침공에서 왜군은 임진년 때와 달리 부산을 택하지 않고 경상 · 충청 · 전라도의 완전 점령을 전략으로 하여 전주를 점령한 후 북진할 계획을 세웠다. 즉 진주 곤양을 거쳐 전라도로 바로 쳐들어가는 노선을 택하였다.   7월 말부터 좌군은 남해(南海)ㆍ사천(泗川)ㆍ고성(固城)ㆍ하동(河東) 방면에서, 우군은 광양(光陽)ㆍ순천(順天)ㆍ김해(金海)ㆍ창원(昌原) 방면에서, 가토는 밀양(密陽)ㆍ초계(草溪)ㆍ거창(居昌) 등을 거쳐 각기 전주로 향하였다. 왜군은 황석산성(黃石山城)의 싸움에서 고전 끝에 승리를 거두었으나 고령(高靈)에서 상주목사 정기룡(鄭起龍)군에 패한 데 이어 직산(稷山) 싸움에서도 패하여 더 이상 북진하지 못하고 남하하여 순천ㆍ울산 등지의 연해안에 진주하게 되었다.   이순신 장군의 해전에서의 해전승전 보고를 받은 도요토미는 그 앉은 자리에서 몇 번을 놀랐다고 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권좌에서 8월 18일 병을 얻어 사망하자 그의 유언에 따라 왜군은 총퇴각을 하기 시작하였고, 이윽고 남해 노량(露梁)에 이르러 최후의 해전이 벌어졌다. 이순신 장군은 명의 수사제독(水師提督) 진린(陳璘)과 합세하여 왜선 200여 척을 격파하여 임진왜란 최후의 이 해전에서 승리하고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이로서 임진ㆍ정유 두 차례에 걸친 왜란은 조선에 무수한 참화를 남기고 끝이 났다.   7년에 걸친 임진ㆍ정유 양 왜란은 조선에 엄청난 피해를 안겨준 채 끝났다. 그 결과 조선에는 실사구시의 실용주의적 풍토가 조성되었고 다양한 제도적ㆍ기술적ㆍ학문적 변혁이 있었으며,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막부시대로 접어들었으며, 또한 원병을 보내 준 명나라도 이로 인한 국력의 피폐가 빌미가 되어 얼마 못 가서 만주족에게 나라를 넘겨주는 비운을 맞아 명은 청나라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곤양지역은 조ㆍ명ㆍ일 삼국 모두에게 커다란 변화를 초래한 임진ㆍ정유왜란의 쓰라린 참화를 겪은 중심지역 중의 하나이다. 무수한 이야기들과 참담한 사연들이 무궁무진하겠으나 대부분의 이야기들은 오랜 세월의 자락에 묻혀 잊혀지고 사라져 곤양지역에서 벌어졌던 당시의 상황을 낱낱이 밝혀내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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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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