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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1. 곤양읍성(昆陽邑城) 옛 곤양읍성(昆陽邑城)은 평지성식의 읍성으로 성내리에 있었다. 성내리는 옛 곤양군 동부면의 지역으로서 곤양성 안쪽이 되므로 성안 또는 성내리라 하였고 지금의 남문외리는 곤양읍성의 남문밖은 남문밖, 남문외리라 하고 성 동쪽은 동밖이라(송정리) 하고 있다. 또 곤양군은 본래 조선 초기까지는 진주 임내에 속했던 곤명현이 남해현을 합쳐서 곤남군으로 승격됨에 따라 곤명면 본촌에 있었던 읍기(邑基)를 지금의 성내리로 옮겨온 것이다. 따라서 곤남군으로 승격된 사유로는 세종대왕 즉위 원년인 1418년 대왕의 태실이 곤명땅 소곡산에 안치됨으로 인해 이듬해(1419) 남해현을 병합하여 군으로 승격하였다. 그리하여 읍호를 두 고을 즉 곤명현 곤자와 남해현의 남자를 따서 곤남군이라 하였다. 이어 세종 19년(1437) 7월에는 다시 분리되어 나가고 대신 진주 임내에 딸렸던 금남부곡(현 하동군 금남면 일대)을 예속시켜 곤양군으로 개칭하였다. 곤양읍성은 곤남군인 세종 1년(1419)에 축성한 평지성으로, 이에 대한 축성기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종대왕 기념 사업회가 1987년 펴낸 (世宗大王 年譜) 역본에 의하면 세종 3년(1421) 7月 곤양성을 쌓았다고 하였고 또 세종 12년(1430) 12月에 도순문사 최윤덕이 경상도의 연일 곤남, 합포(蛤浦)와 전라도의 임파(臨陂), 무안(務安), 순천(順天)과 충청도의 비인(庇仁), 보녕(保寧) 등의 성을 쌓았다고 하였으니, 이로 미루어 세종 3년은 위의 읍성을 쌓기 시작한 해이고, 세종 13년은 읍성이 완공된 해로 본다면 무려 10년 세월이 걸렸음이 짐작된다. 또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 곤양군조(昆陽郡條)에 의하면 “읍성(邑城)은 지난 경술년(庚戌年:1430)에 쌓았으며 성 둘레가 3,765尺이요, 높이가 12尺이며, 성안에 여름ㆍ겨울에도 마르지 않는 우물 둘과 연못 셋과 군창(軍倉)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경술년이라 함은 세종 12년인 1430년에 해당됨으로 전기한 바와 같이 읍성의 완공시기를 말한 것이다. “邑城去 庚戌年 石築 周邊 三千七百六十五尺 高 十二尺 井三 泉二 冬夏不渴有軍倉” 또한 󰡔곤양읍지(昆陽邑誌)󰡕 군성조(郡城條)를 보면 “석축(石築) 둘레는 3,765尺이요, 높이는 12尺이며 성가퀴 767. 동남북(東南北)의 문 셋과 옹성이 열여덟이고, 우물 셋, 못이 둘 있다”고 기록하고, 앞의 지리지(地理誌)보다 그 규모를 소상히 밝혀 주고 있다. “石築 周邊 三千七百六拾五尺 高 十二尺 女堞 七百六十七” “有 東南北 甕城 十八內 有 三井 二池” 이상으로 읍성의 축성시기와 그 규모를 대략 살펴 보았는데 경상도ㆍ전라도, 그리고 충청도 등 해안 연변에 일련의 축성활동이 활발했던 까닭은 세종대에 이르러 태평성대를 누리면서 한편으로는 왜구의 잦은 침범으로부터 백성을 보호하려는 적극적인 조치의 일환임을 엿보게 한다. 그러나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 12년에 완공되었다는 사실과 상이하여 그 사실을 기록하고자 한다. 실록에는 축곤남성(築昆南城, 세종 3년 7월 27일)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세종 12년에는 순문사 최윤덕이 감독을 하고 온 사실을 말하고 있으며, 다시 세종 13년 10월 13일에는 곤남과 합포는 변방이므로 인원을 증원하여 얼음이 얼기 전에 축성을 완료하도록 건의 하고 있다. 이어 세종 14년 1월 15일에는 경상도 감사 조치(趙致)를 합포, 곤남의 연일 성 쌓기를 늦추었다고 파면하였다. 그 후 세종 16년(1434) 7월 27일 우의정 최윤덕은 경인년(경술년?)에 시작하여 5년이 지난 오늘까지 성이 완공되지 않고 있으니 처음에는 날수를 환산하여 백성이 일을 하였기에 어리석은 감독 군인들이 태만하고 날짜만 기다리니 앞으로는 인부의 수에 비하여 성터를 정하여 주어 책임량을 완공하여야만 교대할 수 있도록 할 것을 건의하였다.(사진원문참조) 위의 실록을 보건대 지금까지 알려진 세종 3년에 시작하여 세종 12년에 곤양성을 완공하였다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완공일자가 명시된 것을 찾지 못하였다. 또한 기록에 의하면 세종 즉위년에 무로(武路)에 있는 사람을 뽑아서 연해지방의 수령을 충원하여 왜구를 방비토록 명한 것은 이를 시사해 주는 바라 하겠다. 곤양읍성 세종실록(65권 갑인7월) (세종16년) (1434. 7. 27)

곤양읍성(좌), 세종실록(65권 갑인7월)<br>(세종16년)(1434. 7. 27)

  앞에서도 말한 바 있거니와 곤양성은 산성이 아니고 야성(野城) 즉 평지성이었던 관계로 오늘날 그 성곽(城廓)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 있지 않다. 물론 세월의 탓이기도 하겠거니와 현재 성지 내에는 거의 대부분 학교와 주택이 들어서고 또 밭으로 변하여 석축의 일부가 조금 남아 있고 곤양초등학교 앞 우물은 도로확장 포장시 폐쇄되었다. 성내에는 곤양읍지에 기록된 공해(公廨, 官廳舍)를 보면 ① 객사(客舍, 迎陽閣) ② 동헌(東軒) ③향부당(鄕府堂, 鄕廳) ④ 군관청(軍官廳) ⑤ 장관청(將官廳) ⑥ 인리청(人吏廳) ⑦ 사창(司倉) ⑧ 우병영군향고(右兵營軍餉庫) ⑨ 관청고(官廳庫) ⑩ 대동고(大同庫) ⑪ 사진고(私賑庫) 등의 건물(建物)이 성내에 있었다. 현재 면 청사 앞에는 사천 문화원에서 성곽의 사적(史蹟)을 기념하기 위하여 곤양읍성지비를 세워 두었으며 사지비 옆에는 역대 곤양군수의 공적을 기리는 16기의 비석이 한데 모여 즐비하게 서 있고 또한 항일운동 하다가 순국하신 최원형(崔垣亨)의사의 기적비가 곤양주민에 의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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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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