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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9. 곤양군의 교통(파발로, 역, 원)   교통수단은 해상은 조운선, 뗏목이였으며 육상은 도보, 말, 우마차, 가마 등을 이용하였으며 대략 30리마다 역을 두고 마필, 역정을 갖추고 공문 전체(伝遞)와 공무여행자에게 말을 제공하였다.   경복궁 앞을 원표로 도정(道程)에 따라 10리마다 적은 돈대(少堠:이정표의 일종) 30리(里) 마다 큰 돈대(大堠)를 세우고 리수와 지명을 새기는 것이 원칙이다.   매(每) 5리마다 정자(亭子)를 세우고 오리나무를 심었으며, 30리마다 느릅나무와 버드나무를 심어 도리표시(道里表示)를 하였다. 1) 곤양군의 파발로(昆陽郡의 擺撥路)   파발은 고려 때부터 우역(郵驛)이 있어 통신(通信)과 운수(運輸) 기능을 같이 하여 오다가 선조 30년(1597)부터 통신 위주로 하는 교통제도로써 공문서의 신속한 전달을 꾀하기 위해 전국 9개로를 서울 중심으로 운영하였는데 곤양군은 6번째인 서울, 통영의 파발로를 이용하였으며 공무로 출장가는 사람은 이 파발로선을 지켜야 했고 임의대로 노선을 선택할 수 없었다.   (재료 : 李相佰 博士著 韓國史)   곤양군(昆陽郡)-(50)-진주(晋州)-(20)-단성(丹城)-(50)-산청(山淸)-(50)-사근역(沙斤驛)-(20)-함양(咸陽)-(40)-팔랑치(八良峙)-(20)-운봉(雲峰)-(20)-여원치(女院峙)-(30)-남원(南原)-(10)-율현(栗峴)-(50)-오수역(獒樹驛)-(20)-마치(馬峙)-(20)-임실(任實)-(20)-만마동(萬馬洞)-(20)-전주(全州)-(30)-삼례역(三禮驛)-(20)-탄현(炭峴)-(20)-석마산(石馬山)-(50)-은진(恩津)-(10)-사교(沙橋)-(10)-초포교(草浦橋)-(10)-노성(魯城)-(10)-경천역(敬天驛)-(40)-공주(公州)-(25)-모로원(毛老院)-(25)-광정창(廣亭倉)-(20)-차령(車嶺)-(15)-덕평(德坪)-(10)-김제역(金蹄驛)-(18)-천안(天安)-(40)-성환역(成歡驛)-(20)-소사,직산(素沙,稷山)-(5)-진위(振威)-(5)-선호역(善好驛)-(25)-수원(水原)-(25)-유천(柳川)-(20)-미륵당(彌勒堂)-(20)-갈산첨(葛山站)(광주)-(10)-과천(果川)-(50)-동작동(銅雀洞)-(10)경성(京城) ※( )은 리(里) ※ㆍ6척(尺)=1보(步) ㆍ360보(步)=리(里) 562m ㆍ30리(里)=식(息) ㆍ10리(里)마다 돈대(堠) ㆍ5리(里)마다 정자(亭子) ㆍ30리(里)마다 유유(楡柳) 식재(버들강아지나 버들을 심음) 2) 곤양군의 역 ① 완사역(浣沙驛)   조선 세종 12년(1430)에 남해 덕신역이 왜의 침범을 자주 받아 남해를 육지로 옮기면서 완사역을 설치하게 되었으며 곤양 동북쪽 18리, 동거 진주 평거역 35리 85보, 사천 동계역 45리, 북거 진주 정수리역 19리, 소남역 35리, 서거 하동 황보역 29리, 남거 하동 율원역 22리이며 기마 3필, 역마 3필, 역리 5인과 역노비 12인을 두고 봉계원은 관활에 두고 찰방(종6품)을 두고 있었으나 지금은 유적(遺蹟)이 남아있지 않다. 완사원에 대한 시가 전해지고 있다.<제영편 참조>

곤양읍지 완사·양보역과원의 기록

② 양보역(良浦驛)   <곤양읍지>에는 양보역은 곤양군의 서쪽 25리에 있고 남쪽으로는 남해 덕신(德信驛) 30리, 북쪽으로는 완사역 40리, 기마 3필, 역인 11명, 노(奴) 12명, 비(婢) 6구(口)라 기록되어 있다. 양보역은 진주를 거쳐 완사에서 남해(덕신역)와 중간지점인 양보리 산 100번지 부근으로 추측되며곤양읍지 완사ㆍ양보역과 원의 기록 조선조 연산군 10년에 갑자사화로 남해로 귀양가던 이세좌(李世佐: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가져간 죄)가 남해로 귀양가던 중 명을 받고 이곳 양보역에서 의금부도사 안처식에 의해 목매 처형되었다. ③ 봉계원   세종 27년(1445)에 국용전제(國用田制)를 만들 때 군현의 대중도로와 함께 구분규정 되었으며 도로마다 역과 역원을 설치하였다. 고려 조선때 여행자를 위하여 설치한 여관을 원(院)이라 하고 이러한 원의 건물은 원우(院宇)라 하였으며 원은 인근 주민 중에서 원주가 되어 원위전(院位田)과 함께 관리 하였다. 당시 곤양군에는 봉계원(원전)이 군의 북쪽 15리에 있었으며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시 거쳐 갔다. 또한 완사원은 군의 동북쪽 20리에 있었으며 노량원이 군의 남쪽 40리, 노량 도진에 있었다. 3) 봉수(烽燧) 봉수제는 조선 전기와 마찬가지로 후기에도 거의 변화가 없었다. 다만, 우산 봉수대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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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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