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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1) 歷代 昆陽郡守의 碑 (1) 行郡守李候相成善政碑 順治 18年 7月 立 서기 1661년(현종 2년) ㆍ장소 : 면사무소 앞(비문 판독 불가) (2) 行郡守朴候○○○○碑(박영계(朴永繼)) 康熙 8年 2月 서기 1669년(현종 10년) ㆍ장소 : 면사무소 앞(비문 판독 불가) (3) 行郡守金候夢求永世不忘碑(憲宗朝) 吏盡刷○ 民各安堵 來暮之歌 去思而苦 崇禎紀元后甲子九月 上浣에 立 1864년 9월 상순에 세움 ㆍ장소 : 면사무소 앞 (4) 行郡守洪候繼善愛民淸德善政碑(正祖朝) 乾隆 46年 7月 立 서기 1781년(정조 5년) ㆍ장소 : 면사무소 앞(비문 판독 불가) (5) 行郡守洪候繼善萬古不忘碑(正祖朝) 乾隆 46年 7月 立 서기 1781년(정조 5년) ㆍ장소 : 면사무소 앞(비문 판독 불가) (6) 行郡守河候在鳩善政不忘碑(高宗朝) 近民之地 仰聖惟天 小試割鷄 無擾烹鮮 校今吏復 戶已餼捐 伐石鐫思 ○○循傳 辛丑 8月 日 一鄕 立 서기 1901년 8월 ㆍ장소 : 면사무소 앞 (7) 行郡守李候承道淸德不忘碑(憲宗朝) 捐 擇吏 祛瘼安民 寒後昆山布德陽春 崇禎紀元後 四 甲辰季冬 下浣 十面造 좋은 사람을 가려 뽑아 벼슬자리에 앉혀 일을 시키고, 각종 질병을 미리 예방 제거하여 주민들을 살기 편안하게 하였다. 추운 겨울이 지나 따스한 봄이 오듯 곤양 땅에 훈훈한 봄바람의 덕을 펼치었다. 서기 1844년(헌종 10년) 겨울 하순 10개면이 세움. ㆍ장소 : 면사무소 앞(재임 1843년~1846년 헌종조) (8) 行郡守張候斗表愛民淸德不忘碑(哲宗朝) 德行咸一 幣去革三 以致奠安 如弛負擔 崇禎紀元后五 辛未 12月 上浣에 一鄕 立 군수님은 덕과 행이 널리 일치한 분이셨다. 많은 폐단을 없애고 삼정(田政, 軍政, 還政)을 혁신하였다. 이로써 주민들은 편안하게 되었고, 따라서 각종의 부담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서기 1871년(고종 8년) 12월 상순 향토민이 세움. ㆍ장소 : 면사무소 앞. (9) 行郡守具候羲祖去思不忘碑(高宗) 崇禎紀元后五 癸酉五月 上澣 서기 1873년(고종 10년) 5월 상순 건립함. ㆍ장소 : 면사무소 앞(비문 판독 불가) (10) 行郡守金候泰麟永世不忘碑 祛幣除瘼 ○○○○盡蠲 片石可語 口碑相傳 崇禎紀元后五 癸酉五月 上浣에 立. 서기 1873년(고종 10년) ㆍ장소 : 면사무소 앞

우하영 군수비(좌), 하재구 군수비(우)

(11) 行郡守河候在鳩淸德善政碑(1901) 소재지: 금남면 노량리(남해대교 입구) 규모: 180cm×40cm 3기 중 1기 비 정면에 「行郡守河候在鳩淸德善政碑」 높이 180cm 폭 40cm에 각자되어 있으며 도괴되어 차마 볼 수 없는 상태이며, 하군수는 곤양군수로서 고종조때 근무하였는데 깨끗하고 청렴한 정치를 펼치면서 백성을 위한 선정을 하였기에 이를 기리기 위하여 주민들이 고종 38년(신축 1901년)에 건립하였다. 당시 금남면은 곤양군에 소속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조정으로 하동군에 이속되었다. (12) 郡守禹夏享倡義勘亂救民不忘碑 영조조(英祖朝) 소재지: 금남면 노량리(남해대교 입구) 하동군 노량리에 비가 세워져 있으나 비문이 마멸되어 글자를 알 수 없다. 1728년(영조 4년) 3월 이인좌난 때 곤양군수로 진주영장 이석복과 병관군을 이끌고 참전하여 괴수의 한 사람인 정희량(鄭希亮)의 목을 베고 난을 평정하는 데 큰 공을 세움. (13) 行郡守金候善耆永世不忘碑(哲宗朝) 郡狹愛博 事少功多 恒業生靈 咸歌淸和 崇禎紀元后五 甲子에 十月 上浣 立 비록 군의 영역은 좁지만 사랑은 넓었다. 일은 적으나 공은 많도다. 생업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은 서로 노래 부르며 해맑은 마음으로 사이좋게 지낸다. 서기 1864년 10월(고종 1년) 상순건립. ㆍ장소 : 면사무소 앞. (14) 行郡守金候善耆去思不忘碑(哲宗朝) 同年에 吏廳立 같은 해(1864) 이청사에 건립 ㆍ장소 : 면사무소 앞(비문 판독 불가) (15) 行郡守南候廷麟永世不忘碑 ㆍ장소 : 면사무소 앞(비문 판독 불가) (16) 行郡守 ○候○○永世不忘碑 崇禎 ○○○ 丁丑六月 下浣 ㆍ장소 : 면사무소 앞(비문 판독 불가) (17) 行郡守 朴候○○○○○碑 ㆍ장소 : 면사무소 앞(비문 판독 불가)

민기호 군수 불망비

(18) 行郡守閔候箕鎬淸白永世不忘碑 山高水明 幯垢鼓情 繭絲繡惠 蠹奸○淸 心推赤子 口銘蒼生 新亭翼翼 絃誦有聲 산은 높고 물은 맑으니 묵은 때를 깨끗이 씻고 민정(民情)을 고취시켰도다. 고을을 다스리는 군수의 은혜는 간사한 것을 제거하고 심신(心神)을 맑게 하였도다. 마음으로 적자(赤子)처럼 보호하고 창생(蒼生)을 감명케 하였도다. 새로운 정자를 지어 익익하니 글 읽는 소리가 끊이지 아니하도다. 戊戌 三월 일 입 1898년(고종 2년) 3월 건립 ㆍ장소 : 후전(后田) 국도변 (19) 行郡守李候義健○○○○碑(高宗 2년 朝光武) ㆍ장소 : 면사무소 앞(재임기간 1657년~1658년, 비문 판독 불가) (20) 行郡守李候用漢捄弊不忘碑 ㆍ장소 : 서포면 비토리(본래는 비토 선창에 있던 것을 새마을회관 앞으로 이건) 誰謂無羊 一百其緡 爾愛其羊 我愛其民 孰敢侮予 完文維新 曷以比也 陰崖之春 後面碑文 苟有難忘之恩則豈無永慕之義乎今我李候用漢氏心勤慕聖政先愛民矜此貢羖之難堪特下一百兩錢貿羖取種進封亨需且使鄕廳將廳勿侵島民兼以布錢役錢觸○給島民是以敗亡之洞自然成樣離散之民因爲依居居是島者感於心而銘於口發爲歌而刻于石 官下節目 1. 戶布錢段 與他村半减事 1. 特下錢 一百兩貿羖取種事 1. 左右別監永爲勿侵事 1. 各軍官與別武士永爲勿侵事 1. 稅米負石永爲革罷事 1. 未盡條件追後磨鍊事 座首 幼學 鄭箕榮 吏房 鄕吏 崔象○ 崇禎紀元後 五丁亥 八月 日 上浣 飛兎洞民立 1887년 (고종 24년) 8월 상순 비토동민 건립.

이용한 군수비(좌), 안경환 군수비(우)

행군수 이후 용한 구폐불망비 누가 염소가 없다 하였느냐 일백냥(一百兩)의 금전을 내리도다. 너는 염소를 사랑하느냐 나는 백성(百姓)을 사랑한다. 누가 감(敢)히 나를 모욕하리요. 절목(節目)과 완문(完文)으로 규칙(規則)을 정하였도다. 군수의 은덕을 어디에 비할꼬 그늘진 언덕에 봄이 온 것 같도다. 뒷면의 비문 진실로 잊으지기 어려운 은혜(恩惠)를 입으면 어찌 길이 사모(思慕)하는 의리가 없을까 보냐 이제 우리 이군수용한씨(李郡守用漢氏)가 성현(聖賢)을 사모하는 마음이 근면(勤勉)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정사(政事)를 베풀었다. 우리 섬에서 진공(進貢)하는 염소의 사육에 어려움이 많음을 애휼(愛恤)히 여겨 특히 일백냥(一百兩)의 금전을 내리시어 암염소를 구입하여 종자를 받아 길러서 제사(祭祀)와 향수(亨需)에 진봉(進封)케하고 또한 향청(鄕廳)과 장청(將廳)은 도민(島民)에게 침입(侵入)하지 못하게 하고 또한 포전(布錢)과 역전(役錢)을 감하여 주니 이로 인하여 패망(敗亡)한 도민(島民)이 자연히 일어서며 흩어진 주민이 다시 모여 살게 되었다. 이 섬에 사는 자(者)가 마음으로 감동하고 입으로 새기며(銘) 노래지어 부르고 빗돌에도 새긴다. 관에서 내린 절목 1. 호포의 금전은 다른 마을에 비하여 반으로 감하여 줄 것. 1. 특별히 하사한 일백냥(一百兩)은 암염소를 구입하여 종자를 받을 것. 1. 좌우 별감(左右 別監)은 영원히 침노하지 말 것. 1. 각 군관과 별무사(別武士)는 영원히 침입하지 말 것. 1. 세미(稅米)와 부석(負石)은 영원히 혁파할 것. 1. 미진한 조건은 추후에 마련할 것. 자수 유학 정기영 이방 향이 최상○ 숭정기원후 5년 정해팔월 일 상순에 비토 동민은 세우다. 서기 1887년(고종 24년) 소재지: 서포면 비토리 회관 앞 (21) 行郡守安候敬煥恤民善政碑 前面碑文은 未詳 後面 1. 官赴役永爲勿施事 1. 草鈴役永爲勿施事 1. 路貰役永爲勿施事 1. 未盡保件追後磨鍊事 鄕長 姜 戶長 李 光武 八月 행군수 안후 경환 휼민선정비(비토) 전면의 비문은 알 수 없다.

남정린 군수비

후면 1. 관(官)의 부역은 영원히 하지 말 것. 1. 초령(草鈴)부역은 영원히 하지 말 것. 1. 길의세(路貰)도 영원히 내지 말 것. 남정린 군수비 1. 미진한 건(件)은 추후에 마련할 것. 향장 강○○ 호장 이○○ 광무 八년 월 일(1904년 고종 8년) 소재지 : 서포면 비토리 새마을 회관 앞 (22) 行郡守南候廷麟善政碑 비문은 마멸되어 기록할 수 없음. ㆍ장소 : 서포면 동구(곤양 우티와 서포동구 경계도로변 동쪽) 1890년(고종 27년)

원전 군수비(왼쪽에서 1번 한우섭, 2번 송휘로)

(23) 行郡守 韓候 友燮 善政碑 소재지: 곤명면 원전(지서 동편) 政協敏蒲 奸戢察銖 百里春脚 一片氷壺 糶虛復實 漕痼還蘇 銘口餘頌 壽此龜跌 武豊十年 庚申 정사(政事)는 민협(敏協)하게 하였으며 간사한 무리들은 부드럽게 헤아려 살폈으며 백리(百里) 고을이 봄처럼 화창하고 한 조각 얼음처럼 맑고 깨끗하게 하였도다. 빈 고방을 다시 채우고 그릇된 세제(稅制)를 바로잡아 주었다. 여러 사람이 칭송한 끝에 귀부(龜趺)가 이에 높이 섰도다. 서기 1860년(철종 11년) (24) 行郡守 宋候 徽老 淸德 善政碑 소재지: 곤명면 원전(지서 동편) 推心與人 百里一家 風返修文 陽回斥邪 哭別遇錯 惟去察遐 大賢餘韻 薄試南衙 建陽一年 立(1896년) 마음가짐을 백성(百姓)과 같이하니 백리(百里) 고을이 한 가족 같도다. 풍속은 학문(學文)을 숭상하고 사교(邪敎)를 물리치니 밝음이 돌아오네 만나고 헤어짐에 서로 슬퍼하며 오직 고을을 떠나나 고상(高尙)함을 남겼도다. 대현의 어진 여운(餘韻)이 송휘로 군수비 잠깐 우리 고을에 교화(敎化)하였도다. 건양 1년에 입(立)(1896년 세움.)

송휘로 군수비

(25) 行郡守宋候 徽老淸德愛民 善政碑 소재지: 사천읍 산성공원 수양루 앞 革矯弊瘼 復整欹器 束○○○ 保民○○ 仁明政令 廉平雅志 猗歟○○ 泗○○○ 光武 二年 戊戌 四月 立 군내의 민폐(民弊)를 혁신(革新)하고 다시 아름다운 제도를 세우도다. 정사와 명영(命令)이 어질고 밝으며 마음은 항상 청렴하고 공평하도다. 광무(光武) 二년 (一八九八년) 무술(戊戌) 四월 立

민기호 군수비

(26) 行郡守閔候 箕鎬恤民防弊 善政碑 소재지: 사천읍 산성공원 수양루 앞 際於兼○ 稅○斯○ 國計民隱 式遵蘇捄 鹽浦黎○ 戶稅家尸 功冀洪佛 形富○師 精誠所格 皇若曰咨 苽昆梅泗 爲我愛慈 來何暮也 今焉在玆 稱不容口 靭石以碑 光武 四年 庚子月日 五面 鹽民 立 민기호 군수의 민(民)을 휼(恤)하고 폐단을 막으며 선정(善政)한 비. 이 어려운 때를 당하여 세금을 감(減)하여 주었도다. 나라의 계책에 따르고 법을 준수하여 구제 하였도다. 염포(鹽浦)의 백성이 집집마다 선영을 공손이 제사(祭祀)하도다. 공덕은 부처와 같고 부(富)하여 스승같이 섬기도다. 정성이 지극하니 군왕(君王)께서도 칭찬하셨다. 곤산(昆山)의 고미(苽米)와 사수(泗水)의 매화요 우리들을 위하여 사랑하고 예뻐하였다. 우리 군(郡)에 어찌 늦게 오셨느냐? 이제는 우리 곁에 있도다. 입으로 칭송이 부족(不足)하여 이에 돌을 깍아 비를 세운다. 광무(光武) 4년(1901) 경자월일(庚子月日)에 해안지역 5개면 염전민(浦의 五面鹽民)이 세움.

박기창 군수(좌), 남정인 군수(우)

(27) 行郡守南候 廷麟 愛民 善政碑 ㆍ장소 : 진교면 민다리 공원(公園) 幣邑沉痼 値候其蘇 惠寬收租 政能敏蒲 省憂阽危 勞來集安 民不如荒 口莫口奸 歌有暮來 願無遽歸 萬口一碑 報豈焉哉 光緖 十五年 己丑 四月 日 金陽面民立 행군수 남후 정인 애민 선정비 피폐한 고을 침고(沉痼)하였는데 어진 군수를 만나 다시 소생(蘇生) 하였도다. 은혜스럽고 관대(寬大)하게 세금(稅金)을 거두며 정사(政事)는 민첩하게 하였다. 근심과 위태로움을 없애시고 백성을 편하게 하였다. 백성을 흉년에서 구제하고 보답함을 바라지 않는 어진 군수 늦게 오심을 노래하였으니, 원컨대 빨리 돌아가지 마소서. 만인의 입이 비(碑)보다 나으니 보상과 포창이 무엇하리요? 조두 군수 선정대 서기 1889년 4월(고종 26년) 건립.

조두 군수 선정대

(28) 行郡守 朴候基昌 恤民 善政碑 ㆍ장소 : 진교면 민다리 공원(公園)내 保赤如傷 一庫公土 減其○禾 萬斛恩波 光武 七年 癸卯閏 五月 所査畓 作人 立 김선로 군수 인정대 백성을 어린 아이처럼 보호하고 한창고의 곡식도 공토(公土)에서 생산하며 또한 수 조(租)를 감하여 주니 만석 곡식은 은혜의 덕택이로다. 유사(有司) 문병권(文秉權) 도감(都監) 이사은(李士銀) 1903년 윤 5월 ㆍ장소 : 진교면 민다리 공원 내

김선로 군수 인정대

(29) 行郡守趙候 과 淸德善政臺 西紀 1796年 丙辰 二月 日 改立 ㆍ場所 : 河東郡 辰橋面 古龍里 333-3 畓 건너편 (30) 行郡守金候 善耆愛民仁政臺 西紀 1864年 甲子 九月 日 이병의 군수비 ㆍ場所 : 河東郡 辰橋面 古龍里 333-3 畓 건너편

이병의 군수비

(31) 行郡守李候 丙儀 淸德 善政碑 ㆍ소재지 : 곤명면(昆明面) 구몰리(龜沒里) 국도 도로변 屈子之醒 平原之擧 偘用恢刃 曲折片語 兒租春貸 揚金暮拒 風歌廉來 永思何去 癸卯 五月 日 立 굴원같이 성성(醒醒)하고 평원처럼 거사(擧事) 하였도다. 강직하며 넓은 아량으로 백성들의 어려운 사정(曲折)을 청취하다. 봄에는 곡식을 대여(貸與)하고 또한 금전도 희사 하였다. 어진 군수 오심을 노래하고, 길이 사모하는데 어찌 속히 떠나시나. 1903년 (고종 30년) 5월 세움. ※ 행수법(行守法)과 지사법(知事法) 1) 행수법(行守法) 행수법은 중국 당나라 이후 사용하였고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는 1442년(세종 24년)에 처음 사용하였다. 이에 따르면 품계가 일정하게 정해져 있으나 경우에 따라서는 그 관직 자체의 품계보다 더 높은 품계의 관원 또는 반대로 더 낮은 품계의 관원을 임명할 수 있다. 그 중 품계가 높은 사람을 낮은 관직에 임용하는 계고직비(階高職卑)의 경우를 행(行), 품계가 낮은 사람을 높은 관직에 임용하는 계비직고(階卑職高)의 경우를 수(守)라고 했다. 이로 볼 때 군수비석에 행군수라 하는 것은 곤양군수는 무관 종 4품이었는데 품계가 그(4품)보다 높은 품계의 군수를 지칭하는 것이다. 2) 지사법(知事法) 조선시대 곤양군수의 원직명은 지곤양군사 ○○○이다. 즉, 초대 곤남군수였던 유계분 군수의 원직명은 지곤남군사 유계분이였다. 이 말은 곤양의 모든 일(곤양군사)을 알아서(知) 처리하라는 뜻인데, 일반적으로 知○○○事 라고 하며 보통 지사라고 한다. 同知事는 同知○○○事 라는 의미이며, 領事 또한 領○○○事의 뜻이나, 오늘날의 경남도지사는 知경상남도事에서 道知事로 변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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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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