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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3. 곤양 항일운동 서훈자   (1) 최원형(崔垣亨 : 1901.3.13 ∼ 1945.2.8)      맥사리(脈社里)에서 출생, 1919년 경기고보(京畿高普) 4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3ㆍ1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가하여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그 길로 독립선언서를 간직한 채 고향으로 내려가 당시 해인사 지방학림의 학생이던 최범술 등에게 전달하고 독립운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고초를 겪었고, 1921년 일본으로 유학한 후에도 유학생들과 서로 연락하여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41년 일제가 진주만(眞珠灣)을 기습공격하고 태평양전쟁(太平洋戰爭)을 도발하자 이를 조국 독립의 호기로 생각한 그는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고자 일본에서 귀국하는 한 소녀(金福南)를 통하여 고향 친구이며 자산가인 정재홍(鄭在洪)에게 독립운동 자금 5천원을 송금해 달라는 밀서를 보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이 일경(日警)에 밀고 됨으로 인해 1942년 2월, 일본에서 체포되어 경상남도 경찰부로 압송되었다. 그는 무수한 악형과 고문에 시달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1942년 6월 9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5년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2월 8일 대전형무소에서 옥중 순국하였다. 1977년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1990년에는 훈격 내용의 변경에 따라 건국훈장 애국장(愛國章)이 추서되었다.   기적비가 면사무소 앞에 세워져 있다.   (2) 조우제(趙佑濟 : 1885.3.13 ∼ 1946.8.5)   곤양면 성내리(城內里)출신이다. 보통학교 교원으로 재직하던 그는 1919년 3월 최범술(崔凡述)로 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받아 강달영 등과 함께 진주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그는 1921년 진주청년회 의사(議事), 1922년 조선노동공제회 진주지회 임시의장, 1923년 동우회(同友會) 임원, 1927년 신간회(新幹會)진주지회 간사 등을 맡으며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한편으로 그는 암살단에 가입하여 군자금을 모집하는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는데, 암살단은 1925년 9월경 장진홍ㆍ이원록ㆍ이원기ㆍ이원유 등에 의해 조직되었으며, 일제 주요시설 파괴를 목적으로 하였다. 그러던 1927년 10월경 그는 장진홍이 경북도청ㆍ경북경찰부ㆍ조선은행 대구지점ㆍ식산은행 대구지점 등을 폭파시키려는 계획에 가담하였다. 같은 해 10월 18일 오전 9시경, 장진홍은 미리 준비한 수제폭탄 4개를 목표 지점에 1개씩 배달시켰으며, 이 날 오전 11시 50분경 폭탄이 폭발하여 은행원과 일경 5명이 중경상을 입는가 하면 유리창 70여 개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일경은 이 사건에 대한 신문게재를 금지하는 한편 조사를 비밀리에 진행시켰는데, 이때 조우제는 폭탄을 투척한 활동에 연루, 체포되어 1년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그는 석방된 뒤에도 항일운동을 계속하여, 1931년 4월에는 진주농민조합 조직선전부 위원, 진주 소비조합 취지 및 정관 기초위원 등으로 활동하던 중, 1933년 전북교원 비밀결사 활동에 연루되어 다시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7개월 동안 옥고를 치룬 끝에 1934년 4월 21일 진주 검사국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으로 기소유예처분을 받았다.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3) 최범술(崔凡述 : 1904.5.26 ∼ 1979.7.10)   서포면 금진리(金津里) 율포(栗浦)에서 출생, 어릴 때 이름은 영환(永煥)이었다. 1915년 3월 곤양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4월 해인사 지방학림에 입학하였고, 1919년 3월, 3ㆍ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서울에 유학 중인 최원형(崔垣亨)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받아가지고 해인사 동학들과 함께 만여 매를 인쇄하여 합천ㆍ의령ㆍ진주ㆍ사천ㆍ곤양ㆍ하동 등 일대의 책임을 맡아 배포하면서 해인사를 중심으로 한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1922년 6월 도일(渡日)하여 그 해 8월에 박렬(朴烈)과 서로 만나게 되었으며, 1923년 4월 도쿄릿쇼중학교(東京立正中學校) 3학년에 편입학, 6월에 박렬ㆍ박흥곤(朴興坤)ㆍ육홍균(陸洪均 : 제헌의원)과 함께 불령선인사(不逞鮮人社)를 결사하였고, 그 해 9월에 일본관헌에게 대역사건으로 체포되어 8개월간 예심에서 구속당했다가 출감했다. 1931년 3월,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을 중심으로 불교계의 비밀결사인 만당(卍黨)을 조직하자 이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징역 6월형을 받았으며, 그 후에도 수차례에 걸쳐서 피검되어 투옥되었다. 1942년 7월, 김범부(金凡父)ㆍ김법인(金法麟)등과 해인사ㆍ다솔사(多率寺) 등에서 만당 활동은 물론 수강생들에게 한글을 가르쳤고,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운동에 연루되어 홍원(洪原)경찰서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1986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1990년에는 훈격 내용의 변경에 따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4) 김진곤(金鎭坤 : 1870.7.13 ∼ 1963.10.5)   곤양면 송전리(松田里)에서 출생, 1919년 3월 13일 그는 네 사람의 동지와 함께 백지에 태극기를 그려서 한쪽에 ‘대한독립만세’라 크게 쓴 기(旗)를 곤양주재소에 투입하는 한편, 주민들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어 4월 6일과 19일에는 곤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과 같이 곤양 장날에 모인 군중을 선동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급거 출동한 일헌(日憲)에게 현장에서 피체되어 심한 고초를 당하였고,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을 거쳐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6월형을 언도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1995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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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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