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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2. 독립운동   1919년 3월1일 독립운동의 봉화가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경남 서부지역에도 그 불길이 타 올랐다. 이 무렵 서울의 경기고등보통학교(京畿高等普通學校) 학생이던 최원형(崔垣亨 : 당시 서포면 맥사리 출신)은 3ㆍ1운동이 서울에서 처음 일어나자, 이에 참가하여 수많은 학생들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벌인 후, 그 길로 독립선언서를 간직한 채 고향으로 내려와 당시 해인사(海印寺) 지방학림(地方學林)의 학생 최범술(崔凡述) 등에게 전하고,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벌임으로써 사천 지역에서의 독립 시위운동은 진주의 의거보다 5일이나 앞선 곤양면이 그 효시(嚆矢)가 된 것이다.   최범술(崔凡述)은 해인사 지방학림의 동학들과 같이 선언서 10,000매를 인쇄하여 경남 서부지역 일대에 배포하는 한편, 서포면에서는 송지환(宋芝煥)ㆍ신영범(申永範)의 집에서 태극기 수백 매를 만들어 서포ㆍ곤양 등지의 만세시위를 주동하였다. 최범술은 송지환ㆍ신영범ㆍ임응주(林應柱)ㆍ송찬홍(宋贊洪)ㆍ이주효(李柱孝)ㆍ송수안(宋守安)ㆍ박우미동(朴又米童) 등과 함께 곤양 장날인 3월 중순께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시위를 벌였고, 4월 10일과 16일에는 서포개진학교(西浦開進學校) 생도 및 주민들 100여 명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운동을 펼쳤다. 이때 급거 출동한 일헌(日憲)들에 의해 강제 해산당하고, 주동자 8명은 모두 피체되어 가혹한 형벌 끝에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를 치렀다. 최범술은 독립선언서를 가져온 주모자였으나 만 15세가 못되어 처형만은 면하였다.   그런 한편, 천도교 사천군교구(泗川郡敎區)의 책임자인 장태영(張台永 : 현 사천시 이금동 봉전 출신)은 서울에서 3ㆍ1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급거 상경, 천도교총본부(天道敎總本部)로부터 입수한 독립선언서를 버선 속에 감추고 내려오다가 삼랑진역에서 일경(日警)들에 의해 삼엄한 검색을 당했으나, 위기를 모면한 그는 무사히 사천에 돌아와 강대창(姜大昌), 황순주(黃順柱) 등과 진주의 천도교 인사들에게 부단한 연락을 취했다는 것이다.   일제 고등경찰관계적록(高等警察關係摘錄) 45)에 의하면 1919년 3월 13일 곤양면 송전리(松田里)출신의 김진곤(金鎭坤)외 4명이 백지에 태극기를 그려서 한쪽에 ‘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기를 곤양주재소(昆陽駐在所)에 투입한 후 주민들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이어 또 다시 4월 6일과 4월 19일에는 곤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과 같이 곤양 장날에 모인 군중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운동을 벌이다가 출동한 사천헌병분대(泗川憲兵分隊)에 의해 무자비하게 진압되어 주동자는 피체되고 군중은 강제 해산 당했다. 이때 주동자의 한 사람인 김진곤은 구속되어 모진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월 13일의 곤양의거는 진주의거보다 5일, 사천의거보다 8일이나 앞서 일어났던 것이며, 또한 대진리(大津里)에서도 만세운동이 발생하여 주모자를 검거하고 소요사태를 진압했다는 기록이 있다.   즉 포상팔국 전쟁, 후삼국의 격동기, 임진왜란, 민기호 군수건, 일제강점시 독립운동 등의 역사적 맥락을 돌이켜볼 때 곤양은 외세에 굴하거나 불의에 지배당하는 것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지역정서, 지역 혼, 지역정신이 살아있는 곳으로 나타난다.


  45)<高等警察關係摘錄>, 「泗川地方」, 1919年∼1935年, 慶尙南道警察部, 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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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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