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곤양면 초기 각종 현황
1) 당시 마을별 호수와 인구
자료:곤양향토사료(1930~1932년 평균)
마을 | 성내 | 남문 | 서정 | 송전 | 대진 | 환덕 | 묵곡 | 흥사 | 가화 | 검정 | 중항 | 계 |
호수 | 185 | 74 | 164 | 104 | 141 | 116 | 96 | 66 | 73 | 63 | 99 | 1,181 |
인구 | 916 | 343 | 806 | 484 | 736 | 662 | 538 | 385 | 371 | 297 | 573 | 6,111 |
2) 당시 곤양면의 미곡재배 면적은 496.9정, 보리 재배면적 227.5정 이었고, 반당 평균수량은 미곡 0.9석, 보리 1.0석 이었다.
3) 농지 소유 상황은 지주 10명, 자작농 308호, 소작농 683호였는데, 약 70%가 소작농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부업으로 가마니 짜기, 새끼꼬기, 베짜기를 하였으며, 바닷가 마을에서는 조개 채취가 있었다.
4) 1914년 군청통계에 의한 어업현황은 다음과 같다.
조선인과 일본인들의 수산물 거래 실적을 비교해 보면, 조선 주민 총 수산물 거래량은 135,435관으로 매상고는 43,564원(円)인데 비하여, 일본인은 143,542관으로 매상고는 45,889원(円)으로 조선인 보다 높은 수치를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내용면에서 보면 이때 당시 일본인들은 3단체에 39호만 종사하였던 반면에 참으로 조선인은 아주 영세한 규모였다고 한다.
※ 추수기가 되면 벼를 사기 위하여 일본인들이 들어와서 원전에 점포를 벌려놓고, 성내와 원전에 여관을 차리면서까지 상주하면서 장사를 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