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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3. 봉수(烽燧)   봉수는 횃불(烽)과 연기(燧)로서 긴급한 상황을 전달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이다. 고려 의종 3년(1149)에 서북면 병마사 조진약(曺晉若)의 상소에 따라 법으로 제정하여 전국적으로 실시하였다. 낮에는 연기, 밤에는 햇불로 긴급한 정황을 전달한다. 변경지역과 중앙정부간의 군사용 통신 수단인 것이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평시에는 봉화를 1거(炬), 적이 나타나면 2거, 적이 국경에 접근하면 3거, 국경을 넘어오면 4거, 접전을 하면 5거를 올리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구름이 끼거나 바람이 불어서 연락을 할 수 없을 때는 봉졸(烽卒)들이 차례로 달려와 보고한다. 서울에서는 5원(員)이 병조(兵曹)에 보고하고, 지방에서는 오장(伍長)이 관할 진장(鎭長)에게 보고하였다. 목멱산(木覓山 : 서울의 남산)봉수에는 병조에서 후망(候望)을 정하여 다음날 새벽 일찍 승정원에 보고하여 국왕에 계문케 하였고, 만약 변고가 있으면 밤에라도 바로 즉시 보고하게 하였다.   각 봉수대에 소속된 봉수군은 봉수대 위에서 기거하면서 후망과 봉수를 올리는 요원이다. 고려말 조선초 이후 봉화군ㆍ봉졸ㆍ봉화간ㆍ후망인 등으로 불렀다. 세종 19년(1437) 이후에는 연변연대는 매소의 정원 10여 명이 매번 3명씩 5일마다 교대하다가 다시 10명의 상ㆍ하 양번으로 10일마다 교대한다. <경국대전>에 봉수군은 서울 남산에는 군사 4인, 오장 2인, 연해와 변경지방은 군사 10인, 오장 2인, 기타 내륙지방에는 군사 6인, 오장 2인을 배속했는데 이들은 봉화대 근처의 거주자라야만 하였다. 또한 봉군은 다른 군역에 종사할 수 없도록 규정되었다. 봉수대는 10리 혹은 수 10리마다 후망의 요지, 산정에 설치하였는데, 연대는 봉수대 본연의 임무 이외에, 적의 침입을 받았을 때 현지에서 싸우는 군사적 고지이기도 하고 적의 침입을 즉시 부근의 주민에게 알리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봉수(연대)의 관장은 중앙에서는 병조의 무비사(武備司)에서, 지방에서는 수령의 직접 책임하에 감사ㆍ병사ㆍ수사와 도순찰사ㆍ순찰사 등 모든 군사 책임자가 이 임무를 맡고 있었다. 수령과 감사는 행정의 책임자로서의 위치보다도 그들이 겸대하였던 군사 책임자(진장)의 위치에서 맡았던 것이다. 수령은 봉수군 후망의 실태를 감독하여 이와 연대책임을 졌으며, 유고시에는 즉시 감사에게 보고하고 또 이를 병조에 이첩시켰다.   <경국대전>에는 서울의 목멱산(남산)에 5개소의 봉화대가 있어서 제1은 영안도(함경도)로부터 강원도를 거쳐 양주 아차산(峨嵯山)에 이르는 봉수를, 제2는 경상도에서 충청도를 거쳐 광주 천림산(廣州天臨山)에 이르는 봉수를, 제3은 평안도 강계에서 내륙으로 황해도를 거쳐 한성 관악 서봉에 이르는 봉수를, 제4는 평안도 의주로부터 해안으로 황해도를 거쳐 한성 관악 서봉에 이르는 봉수를, 제5는 전라도로부터 충청도를 거쳐 양천 개화산(開花山)에 이르는 봉수를 받았다. 이는 전국 5로인 간선을 말하는 직봉(直烽)이고, 그 외 간봉(間峰)이라는 보조선이 각 직봉선상에 적지 않게 있어서 직봉과 직봉의 중간지역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봉수의 상호거리는 위에서 말한바, 각기 산세와 운무 등의 자연 조건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므로 일정한 기준이 있을 수는 없었지만, <경상도지리지>의 경우를 보면 연대는 평균 10리가 표준이 되고 있다.   사천지방의 조선초기 봉수대에 관한 자료는 각종 지지(地志) <봉수조>에 기재 되어 있다. <경상도지리지>에는 세종 7년(1425)에 이미 사천현의 침지(針枝)봉화, 성황당석성(城隍堂石城)봉화, 그리고 진주 임내각산향(角山鄕) 주산봉화 등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약 30년 후의 기록인 <세종실록지리지>도 상기한 세 봉수대의 장소에 변함이 없다. 다만 곤남군(곤양)의 경우 당시 남해도가 곤남군 지역이었으므로 금산(錦山)ㆍ소홀산(所屹山)ㆍ망운산(望雲山) 등 봉화 3곳이 새로 등재되어 있다. 세종ㆍ단종대에는 이 여섯 봉수대가 포진(구량량ㆍ적량ㆍ노량ㆍ사천진 등)의 방비에 비상통신의 역할을 하고 있었으며, 각산ㆍ침지ㆍ성황당봉화대는 사천진을 방수(防戍)하는 해안 초소로서, 그리고 남해도의 3곳 봉화대는 구량량ㆍ적량ㆍ노량만방호진을 방수하는 후망소로서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세종실록지리지>가 나온 약 15년 후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에 안점(鞍岾)봉화가, 곤양군은 우산(牛山)봉화가 새로 등재되어 있다. 따라서 사천지방의 봉수대는 세조 연간에 재정비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곤양의 우산봉수는 곤양의 남쪽 2리에 위치하고, 초기(初期)봉화로서 동쪽으로 진주각산봉수에 상응한다. 그런데 곤양읍지에는 없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41)“(前略) 歲在甲申以海路危年漕運立陸轉之法納于忠淸道忠州地 慶源倉” <慶尙道地理志> 「道內租稅捧上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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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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