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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제3절 임진왜란 이후의 곤양   조선전기 정권정비를 위한 내부적 정쟁, 변방의 왜구 및 북방 이민족의 간헐적 침공 외 이렇다 할 커다란 환란이 없었던 탓에 임진왜란과 같은 참화를 미처 대비하지 못하여 조선은 심각한 후유증과 변화를 맞게 된다.   그런 변화 중 곤양의 변화도 예외가 아니다. 제1편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겸사도도체찰사(兼四道都體察使) 이덕형(李德馨)과 부사 한준겸(韓浚謙)의 “곤양ㆍ사천ㆍ고성ㆍ순천 등지에는 인가가 전연 없고 그 전면의 당포(唐浦)ㆍ사량(蛇梁) 사이까지 형편없이 비어 있어 매우 염려됩니다. 난리 후 10년 동안 백성들은 온갖 역사(役事)에 시달려 고혈은 이미 다 빠지고 목숨만 겨우 붙어 있습니다. 소신이 지난해 연해를 두루 다녀보니 백성들의 형편이 매우 가련하였습니다.”라는 보고에서 보듯 당시 왜란의 후유증이 얼마나 심각하였던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참고:백관들에게도 전란후 2년이 지난(1601년) 후에야 녹봉을 지급하였다고 함)   하지만 제도적으로는 그다지 뚜렷한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곤양군의 행정조직으로는 임란 전과 같았지만 다만 육방의 향리조직이 세분화되어 각 종 색(色)으로 재편되었다는 점이 다르다. 임란 이후 군사조직 면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잡다한 군색과 양역이 생겨났다. 아마 곤양이 바다를 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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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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