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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제4절 6ㆍ25 한국전쟁과 곤양(昆陽)   1950년 6월 25일 계절상(季節上)으로 하지(夏至)다. 모내기와 보리 수확기로 농촌(農村)은 노동력 부족으로 바쁘기 짝이 없고, 연중(年中) 가장 분주 할 때이라 마침 군대생활을 하는 농촌출신(農村出身) 장병(將兵)들은 농번기(農繁期) 휴가로 농촌(農村) 일손 돕기를 하고 있었다. 6월 23일은 전군(全軍)에 비상경계(非常警戒) 태세(態勢)를 해제(解除)하고 장병(將兵)들은 외출(外出), 외박(外泊)이 허용됨으로서 토요일(土曜日)인 6월 24일에는 많은 군인(軍人)들의 외출(外出)과 외박(外泊)으로 인하여 경계태세(警戒態勢)가 허술한 일요일(日曜日)인 6월 25일이였다. 이 날 새벽에 북한 공산군은 38도선 전역에서 남침해 왔다. 불의의 습격을 받은 국군(國軍)은 자유수호(自由守護)의 결의(決意)를 다짐하고 용감히 싸웠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6월 28일에 서울이 점령(占領)되고 만다. 이렇게 북한 공산군(共産軍)이 불법남침(不法南侵)을 하자 UN은 즉시 안전보장(安全保障) 이사회(理事會)를 열어 우리나라에 군사적(軍事的)으로 원조(援助)할 것을 결의(決議)하였다. 이 결의에 따라 1950년 7월에 UN군(軍)을 한국전선에 참전시켰지만 북한(北韓) 공산군은 7월 23일 전주(全州)를 점령하고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남진(南進)하여 전라남도(全羅南道) 광양(光陽)ㆍ구례(求禮)와 하동(河東)등지로 접근(接近) 하였다. 7월 25일 하동읍(河東邑)을 또다시 공산군(共産軍)에게 내주니, 이를 탈환하기 위해 UN군(軍)과 전 육군참모총장(前 陸軍參謀總長) 채병덕(蔡秉德) 장군이 하동전투(河東戰鬪)에 투입(投入)되어 최선(最善)을 다하였으나 7월 27일 하동 적량 전투에서 채(蔡)장군이 전사(戰死)하고, 한ㆍ미연합군은 많은 사상자를 낸 채 진주로 후퇴하였으며, 공산군(共産軍)은 북천면(北川面)과 곤명(昆明) 원전(院田)을 거쳐 7월 28일 밤에 곤양(昆陽)을 점령(占領)하게 되었다.   앞서서 7월 25일 곤양 시일(市日)에는 작전상(作戰上) 후퇴(後退)한다는 수많은 국군장병이 곤양시내를 거쳐 가고 있을 때에, 신익희 국회의장과 국방장관이 현지 전황을 파악하기 위해 곤양을 통과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곤양유지(강재관 전 면장 등)들이 한복을 입고, 이들의 차량을 정차시켜서 전황을 문의하였지만, 국군이 용전분투한다는 이야기만 남기고 이들은 곤양을 거쳐 가기만 하였다.   그러나 작전상(作戰上) 후퇴(後退)하는 국군장병(國軍將兵)의 패기나 그 모습은 패잔병 그대로였으니, 그들을 바라보는 국민들은 얼마나 불안(不安) 하였겠는가? 적(敵)의 점령지(占領地)에 들어가면 UN군이나 국군(國軍)에게는 적지(敵地)일 수 밖에 없으니 곤양(昆陽) 땅도 예외(例外) 일수는 없었다.   수난(受難)의 50여일(1950.7.28 ~ 1950.9.24)   공산군의 호남지역 공략을 끝낸 상황 속에서 하동은 영ㆍ호남의 관문인 동시에 사천과 진주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였지만, 거의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었다.   1950년 7월 20일 대전을 점령한 적 제1군단은 후속하던 제6사단을 호남지역으로 우회하도록 임무를 부여하였다. 따라서 호남지역을 석권한 공산당 제6사단(사단장 方虎山소장)은 7월 25일 순천에서 전사단(제13ㆍ제14ㆍ제15연대)을 규합한 후 하동 방면으로 동진(東進)을 시작했다. 이때 전선은 경남지역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곤양도 1950년 7월 29일 공산군 점령하에 들어갔다. 공산군 제6사단이 하동을 점령(7.26)한 후 사천ㆍ진주를 공격할 때, 사천의 곤양ㆍ곤명면은 공산군의 선두 공격부대의 전략적 통로였던 탓으로 미군기의 집중 공격대상이 되어 이로 말미암아 입은 전화(戰禍)는 전군(全郡)을 통하여 인적, 물적 피해가 가장 많았던 지역이다.   그것은 8월 1ㆍ2일 양일간 곤명면 조장리(助場里)와 마곡리(麻谷里)에서 미군기에 의한 주민들의 피폭사건이다. 먼저 조장리의 피폭은 8월 1일에 일어났으며, 이날 오전 조장마을을 비롯한 인근 마을 주민 수백 명이 피난차 조장마을 앞 곤양천(昆陽川)둑에 모여들었다. 그 당시 나돌던 소문은, 피난할 때 흰 옷을 입고 한데 모여 있으면 비행기가 폭격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대부분의 주민들은 삼베옷을 입었고, 더러는 차일을 치고 솥을 걸어 음식을 조리하는가 하면 빨래감도 널어놓았다. 그런데 이날 난데없이 나타난 미군기 1개편대(4대)가 처음엔 저공으로 정찰하였다. 그러나 아무래도 위장한 적군으로 오인한 탓인지 다음은 강둑을 향해 무차별 기총소사(機銃掃射)를 가하니 강둑은 별안간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참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결과 남녀노소 할 것 없이 100여 명의 사상자(사망 81, 부상 28)를 내었고, 일가족 몰살만도 두 가구나 되었다. 다음날 2일에는 마곡리 주민 200여 명이 마을 앞 제방(마곡천)에 모여 피난하다가 역시 미군기에 피폭되어 37명(사망 14,부상 23)의 피해를 입었다.   전란과 적치하의 이 지역은 인명 피해 뿐 아니라 공공건물을 비롯하여 민가의 소실ㆍ파괴된 것이 무려 1,000여 호에 달했다. 특히 곤양ㆍ곤명 양 지역은 적 공격부대의 집결지로서 그 피해가 매우 심했다. 곤양 성내리는 거의 폐허화되다시피 하였고, 곤명면사무소ㆍ완사초등학교ㆍ완사지서ㆍ곤명지서 등 공공건물은 모두 소실되거나 파괴되었다.   곤양(昆陽)이 공산치하(共産治下)에 들어가게 되자 그들을 지지(支持)하는 사람들은 곤양인민위원회(昆陽人民委員會)와 치안대(治安隊) 등을 조직(組織)하여 행정(行政)과 치안(治安)을 담당하게 되고 공산주의(共産主義)를 반대(反對)하는 사회(社會)ㆍ정치단체(政治團體) 인사(人士)들은 부산(釜山)을 위시(爲始)해서 미점령지(未占領地)로 피난(避難)을 가기도 했다. 그러나 피난 못간 사람들은 친공(親共)단체 사람의 좌(左)익이니 우(右)익이니 하면서 반목(反目)과 각박(刻薄)하고 살벌(殺伐)한 분위기(雰圍氣)속에 적대시(敵對視)하면서도, 다른 지방(地方)과 달리 보복 살상 등 큰 사고(事故) 없이 어려운 기간(期間)을 슬기롭게 넘겼다는 것은 우리 곤양사람들의 자랑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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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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