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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제2절 곤양에 호열자(콜레라) 발생   일제의 억압에서 해방의 기쁨도 잠깐, 정치적으로 혼란이 계속되던 1946년 여름(6월로 추정) 중항리 와티에서 괴질이 발생되었다는 급보가 면사무소에 접수되자 면사무소는 당시 총무계장(고 하영신)과 면내 유일한 의사였던 홍의관 의사와 조수(정태호 : 검정리 거주)와 파출소 순경 1명과 4명이 현지에 출장하여 상황을 파악하면서 호열자를 진단하는 한편 외딴곳에 위치한 민가를 빌려 임시 상황실을 설치하고 숙식을 마을사람들과 격리하여 손수 해결하며, 마을사람들 중에서 활동 가능한 사람을 선별하여 방역ㆍ음료수 조달 등 긴급임무를 부여하고 숙박하는데, 새벽에 소동이 일어나서 파악하니 어제까지 건강한 사람이 밤새 병사하는 등 사망자가 늘고 분위기는 악화되니, 순경이 철수하고 이어 파견한 사람들 모두가 철수하고 의사만 남아 환자를 돌보고 있다가 3일 만에 조수(정태호)가 의사와 교대 근무하게 되었다.   병은 계속 확산되자 군에서(위생과장 고 황순주)는 도의 발령으로 현지 파견 근무 중인 조수(정태호)에게 “임시방역촉탁요원”으로 발령하여 곤양ㆍ곤명ㆍ서포에 방역활동을 하게 하는 한편 이병환자(罹病患者)들은 곤양 당천(현 중학교 옆)에 임시 병사를 지어 격리 수용 하였으며, (당시 주치료제 링거) 마을 간에는 금줄이 설치되어 마을간 통행을 금지시켜 생활에 지장을 주었다.   이렇게 생활불편과 공포에 떨게 했던 괴질은 1년간 지속되었고, 사망자는 면내 50여 명으로 추정되며 가장 집단적으로 희생이 많았던 곳이 와티의 38명과 기타 지역에서 3~5명의 생명을 앗아가는 비운을 남기고 평온을 되찾았다. 뒤에 분석한 결과 전염처는 일본에서 귀향하는 동포로부터 전염된 것으로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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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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