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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제1절 해방 정국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황(日皇) 히로히도(裕仁)의 무조건 항복 방송은 사천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들 입에서 새어나와 군민(郡民)들에게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주민들은 처음에는 반신반의하였으나, 이 날 일본군 군속으로 있던 김삼조(金三祚)가 비행장에서 트럭을 몰고 읍내로 나와 전파함으로써 항복소식은 퍼져 나갔다. 때마침 이 날은 사천 장날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8.15 광복 이후 국내의 정국은 혼미(昏迷)가 계속되었다. 이에 앞서 1945년 8월 9일 이미 패망을 감지한 조선총독 아베(阿部信行)와 정무총감 엔도오(遠藤隆作)는 패전 후 일본인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보호책과 치안유지의 목적에서 그들이 행사하였던 권력을 국민의 신망이 두터웠던 송진우(宋鎭禹)에게 위임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송진우는 미군의 진주와 함께 일본군의 무장이 해제된 다음에 해외에 있는 우리 임시정부요원들이 돌아오면 곧 정권을 맡게 될 것으로 생각하고 이 요구를 거절하였다.   8월 15일 당일 여운형(呂運亨)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가 나타나 송진우와 다른 색깔과 노선으로 활동을 개시하였다. 사실상 여운형은 1944년부터 <조선건국동맹>을 지하에서 지휘하다가 8월 15일 당일로 표면에 나타나 활동을 시작했던 것이었다. 송진우와의 교섭에 실패한 아베총독은 여운형을 다음 교섭 대상으로 지목했다. 그리하여 일본의 항복과 때를 같이하여 <건준>의 발족을 선언, 여운형 자신이 위원장에 취임했다. 이렇게 해서 해방 직후의 정권장악의 주도권은 먼저 여운형에게로 돌아갔다. 조선 총독부는 여운형과의 합의에 따라 <건준>의 결성을 지원하며, 치안유지의 권한, 방송국ㆍ언론기관 등을 이양하였다. 하지만 8월 18일 하오, 갑자기 여운형에게 대한 행정권 이양을 취소하고 신문사와 학교를 다시 총독부가 접수하였다. 그러나 <건준>의 조직은 이미 남북한 전역에 걸쳐 8월 말에는 전국적으로 145개의 지부가 결성되었다. <건준>을 형성하고 있는 중심세력은 여운형 중심의 <건국동맹>, 안재홍(安在鴻) 등의 우익세력, 이영(李英)ㆍ최익한(崔益翰) 등이 중심이 된 장안파 공산주의자, 박헌영(朴憲永)이 중심이 된 재건파 공산주의자 등이어서 <건준>은 출발 당시부터 다양한 세력간의 갈등을 안고 있었다. 결국 우익세력의 안재홍 일파가 탈퇴하는 사태에 이르러 <건준>은 9월 6일 소위 건국 대표자대회를 개최하고, <조선인민공화국 임시조직법안>이란 것을 통과시킨 뒤, 중앙인민위원 55명, 후보위원 20명, 고문 12명을 선출하였다. 또한 이들은 지방의 건준지부도 점차 인민위원회로 개편하기도 하였다.   경남에서는 10월 5일 도내 각 군의 지부에서 선출한 대의원 242명과 도지부 위원으로 구성된 <건준> 경남대표자회의를 부산극장에서 개최하였다. 여기에서 <경남 인민위원회>가 새로 조직되어 새 출발을 하게 되었고, 따라서 시ㆍ군마다 지방인민위원회가 생겨났다. 이 인민위원회는 면단위에서부터 출발했으며, 그 구성에 있어서 다양한 계급 계층을 포괄하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소위 지방유지라고 불리어지는 부유한 우익 인사에 의해 인민위원회가 이끌어지기도 하였다.   이들은 간부진을 구성하고 각 읍면과 마을까지 조직을 마쳤으며, 읍면지부와 전평(全評)에 이어 전농조합(全農組合 : 45.12)ㆍ청년동맹(靑年同盟 : 46.4)ㆍ부녀동맹(婦女同盟) 등이 그들의 하부조직이었다. 이들은 여세를 몰아 조직적으로 좌익세력을 부식해 나갔으며 숱한 파괴활동을 자행하였다. 1946년 2월 7일의 곤양좌익 세력이 일으킨 테러사건도 이런 맥락으로 살펴볼 수 있다.   8월 21일 서울 상공에는 미군기가 나타나 하지(J.R.Hodge)중장이 가까운 시일 안에 상륙 할 것이라는 전단(傳單)을 뿌렸다. 그리고 미군이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딘 것은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하여서 지금까지 이 땅에 주둔하고 있다. 9월 9일 4시 일제의 식민지 착취와 압박으로부터 우리 한민족 3천만 동포가 해방되었음을 실증하는 일본의 항복조인식(降伏調印式)이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있었다. 하지중장 중심의 미군측 대표단과 아베총독(阿部總督)의 일본식민관료들의 조인식이 있었었다. 하지만 우리 조국 광복이 이루어지는 바로 이 역사적 순간에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공식 대표단이 참석하지 않았다는 점이 이후 민족사의 질곡을 예고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어떻든 우여곡절 끝에 1948년 역사적인 5.10총선거를 치른 후 제헌국회(制憲國會)가 구성되고 대한민국이 탄생하였다. 1948년 12월 12일 UN총회에서 찬성 41표, 반대 6표로 대한민국 정부가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곧이어 1949년 1월 1일에는 미국이 대한민국을 승인한 것을 시작으로 연이어 각국 정부들도 계속해서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하였다. 동시에 한반도에서 외국군을 철수한다는 UN의 결정에 따라 500명의 군사고문단(軍事顧問團)만 남기고 모든 전투부대는 1949년 6월 29일을 마지막으로 철수를 끝냈다.   5.10총선거 당시 곤양에서 당선된 사천의 제헌 국회의원은 항일운동가로서 전 다솔사(多率寺)주지였던 무소속의 최범술(崔凡述)이었고, 경남 도내에서는 32명이 당선되었다. 전국에서 선출된 198명의 의원으로 구성된 국회(國會)는 그 해 5월 31일 발족하였다. 국회는 이날 2년간의 제헌국회 개원식에 이어 초대 의장에는 이승만(李承晩), 부의장에 신익희(申翼熙)ㆍ김동원(金東元)을 각각 선출했다. 이어서 6월 3일에는 국회내에 헌법 기초위원회가 구성되어 헌법ㆍ정부조직법에 착수하였는데, 유진오 안(兪鎭午 案)을 원안(原案)으로, 권승렬 안(權承烈 案)을 참고안으로 하여 심의를 거듭한 뒤, 20일만인 7월 12일에 드디어 전문 10장 103조로 된 대한민국 헌법의 제정을 이루어서 7월 17일 초대 의장 이승만의 서명으로 헌법을 공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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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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