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곤양향토사



곤양향토사

제6절 일제말기의 곤양   1925년 4월, 일본은 교통이 불편하다는 이유만으로 진주에 있던 경상남도의 도청을 부산부(釜山府)로 이전하고, 6월에는 진주 ∼ 마산간 철도를 개통시켰다. 이로써 진주는 수백년 이래 웅도거읍(雄都巨邑)으로, 그리고 경상남도의 관찰부 및 도청으로 이어온 지방행정의 중심지로서의 역할과 기능이 일시에 상실되어 한낮 지방도시로 전락하였다.   당시의 도청 이전문제는 경제ㆍ사회적 측면 뿐 만 아니라 정신ㆍ문화적으로도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켜, 마산ㆍ진주를 비롯 경남 중서부 12군이 모두 연계하여 도청 이전의 반대운동을 연일 전개하였다. 때로는 격렬하게 시위운동을 벌였는가 하면, 심지어 전기를 끊고 도지사 관저를 습격하는 등 대대적인 도민대회까지 개최하기도 하였으나, 결국엔 총독부의 결정을 번복하기는 불가능했다.   1937년 3월에 남선전기(南鮮電氣)가 통제권을 행사하여 남선합동전기주식회사로 창립과 동시에 모든 전기는 동사가 경영하게 되고, 이듬해 여름부터는 강원도 영월발전소로부터 송전되는 전기를 공급받게 되었다. 당시의 전기공급체계는 남선합동전기주식회사 진주영업소 산하에 사천, 삼천포출장소를 두었고, 곤양에는 산숙소(散宿所)가 있었다.   1937년 7월 7일 일본제국주의는 이날 중일전쟁을 일으켜 대륙침략의 본색을 드러내었다. 1938년 2월 26일에는 4월 3일부터 시행한다는 이른바 ‘조선육군지원병령(朝鮮陸軍志願兵令)’을 공포하고 4월 10일로서 마감한 제1기 모집인원 400명에 대한 지원자 수는 무려 2,600여 명에 이르렀다.   1938년에는 역시 일본인 야마다(山田)가 서포면 외구리의 갯벌을 막아 방조제 약 2㎞를 축조하고 간척지 약 200ha를 조성했는데, 이 제방을 이른바 오리방천(五里防川)이라 부르기도 한다.   1940년부터 사천평야에 수천 명의 보국대가 동원되어 군용비행장을 건설하였다. 1940년 2월부터는 전국민에 대하여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하기 시작하여 10월부터는 ‘국민총력연맹(國民總力聯盟)’이라는 명목으로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운동을 강행하기 시작했다. 또 1941년 3월에는 소학교 규정을 공포하고 우리나라의 역사와 조선어 학습을 폐지하였고, 일본어(日本語)의 상용을 강요하였다. 8월부터는 농산물의 공출(供出)제도를 강제로 시행하더니 12월 8일에는 마침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다.   1944년 8월 ‘여자정신대근무령(女子挺身隊勤務令)’을 공포하여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 없는 여자를 징용하여 정신대 근무령서를 발부하고, 군수공장 등의 노력 동원에 끌어갔다. 이렇듯 식민지 치하의 한국 여성들은 1938년부터 1945년 패전 때까지 일제가 침략한 전쟁터 모든 곳에, 심지어 남양의 최전선에까지도 정신대라는 이름 아래 당시 8만 ~ 10만 명이 위안부(慰安婦)로 끌려갔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1943년 11월 27일에는 미ㆍ영ㆍ중 3개국에 의하여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에 자유독립할 것’이라는 이른바 ‘카이로선언’이 있었고, 1945년 7월 26일에는 이 카이로선언의 이행을 확인한 ‘포츠담선언’이 있었다. 이에 앞서 미국은 7월 16일에 최초의 원자탄(原子彈)폭발 실험을 하고, 8월 6일에 일본 히로시마(廣島)에 B-29 폭격기에 의해 원폭을 투하했다. 이러한 대공세에 몰린 일본 군국주의는 8월 9일 포츠담선언의 조건부 수락의사를 연합군에 통보하고, 8월 9일 두 번째로 원폭이 나가사키(長崎)에 투하되자 8월 15일 정오를 기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우리나라는 일제 35년간의 질곡(桎梏)에서 마침내 해방되었다.   당시 일제강점기의 곤양의 편모(日帝强占期 昆陽의 片貌)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곤양면(昆陽面)   원곤양군(元昆陽郡) 동부면(東部面)의 명칭으로 성내리 193번지에 면사무소가 있었고, 1907년 행정구역정리로 동부면과 가리면(加利面)이 하나의 면으로 합치게 되었다.   일제(日帝)에 들어 1914년 4월 군(郡), 면(面)이 폐지, 분할(分割)됨에 따라 곤양군이 폐지되고 합병된 면은 곤양면(昆陽面)으로 개칭하여 성내리 194번지 원곤양군청사(元昆陽郡廳舍) 건물로 이전하였다. 총 건평(建坪)은 26평으로 회의실(會議室) 겸 면장실(面長室), 사무실(事務室), 서류창고(書類倉庫), 숙직실(宿直室)이 있었다.   ① 면 협의회   1917년 면 협의회(面 協議會)를 두고 면장 자문기관(諮問機關)으로 운영되다가 1931년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면 협의회원을 종전과 달리 선거제(選擧制)로 하였다. 의원정수는 10명으로 하고 동 5월에 성내리 3명, 남문외리 1명, 서정리 1명, 환덕리 2명, 묵곡리 1명, 흥사리 1명, 검정리 1명으로 85명의 유권자가 선출하였고 면직원(面職員)의 정원(定員)은 6명이였다.

② 호수(戶數) 및 인구(人口)

(자료:곤양사료)
년도호수인구출생사망
19141,1065,729
19301,1996,117164(2.68%)84(1.37%)
19311,1796,080177(2.91%)133(2.19%)
19321,1636,136205(3.34%)87(1.42%)

  ③ 호구의 증감원인   증감의 주요 원인은 1929년도에 흉작의 영향을 받아 대 불황으로 각지로 전거자가 속출하므로 점차 감소되었다.   2) 곤양우편소   곤양우편소는 한일합병 전 1908년에 설립되었으나 당시에는 3일에 1회의 우편물 배달에 그쳤다. 그 후 2일에 1회 배달에 소포(小包)ㆍ위체(爲替) 등의 업무도 취급하게 되었고, 1910년 9월 16일 일인(日人) 소천신차랑(小川新次郞)소장이 부임하여 저금(貯金) 사무까지 추가로 취급하며 점차 타면(곤명, 서포)까지 배달을 하게 되었다. 또 동년 10월 21일 전신(電信) 사무가 시작되었으며 1911년 3월 21일 공중전화(公衆電話)도 취급하게 되었다. 그리고 1929년 10월 1일 조선간이(朝鮮簡易) 생명보험(生命保險) 사무를 개시(開始)하였다.   3) 곤양금융조합   1919년 11월에 설립하여 곤양면ㆍ서포면ㆍ곤명면ㆍ하동군ㆍ옥종면ㆍ북천면 등 5개면이 업무구역으로 업적이 양호해 짐에 따라, 1931년도에 하동군 옥종면 청룡리에 지소를 설치하여 산업개발(産業開發) 및 조합원의 증원(增員) 등에 힘써 조합원 수 1300여 명, 총 대출고(貸出高) 220,000여 원, 총 예금고 82,000여 원에 달하였다.   4) 곤양 상인(商人)의 발자취   보부상(褓負商)이 각 시장 장날을 따라 돌아다니는 등짐장수에서부터 정(定) 위치(位置)에서 점포식 장사로 바뀌게 된 동기는 1907년에 일인(日人) 가제야마(蔭山三平), 기타무라(北村眞五) 등이 성내에 잡화점(雜貨店)을 개점하고 추수(秋收) 때 부산에서 미곡(米穀) 매수(買受) 상인들이 왕래하였다. 곤명면 원전에도 일인 상점 2호가 잡화상을 개점(開店)하였으며 여관(旅館)도 생겼다.   우리나라 상인들도 점포를 설립하여 노점(露店)에서 생활필수품, 매점으로 발전하면서 주막(酒幕) 등 그 수가 늘어나고, 시일(市日)도 음력 5, 10일로 정해 개시하게 되었다. 주 상품으로 일용잡화, 직물, 어류, 주류, 식염(食鹽), 석유, 비료 등으로 이는 이입품(移入品)이고 미(쌀), 면(목화), 견(누에고치) 등을 비롯한 농산물, 수산물, 축산물은 이출품(移出品) 이었다.   5) 교통   ① 육로교통(陸路交通)   곤양군 말기까지 1등, 2등 도로는 없었고 사천선ㆍ노량선ㆍ단성(원전)선이 3등 도로였고 송전ㆍ광포선은(3381m) 등외 도로였으며, 도로 곧 신작로(新作路)가 개통된 것은 1913년 진주 ~ 하동간 그리고 동년 겨울에는 성내 ~ 원전간 도로가 개통하여 성내 ~ 진주간, 성내 ~ 하동간에는 차, 말이 편하게 운행되었고, 성내 ~ 진교간 또는 사천간 도로는 미개착(未開鑿)되어 말등(馬 背)에 의해 소로길 도보(徒步)로 불편하였으나 계속된 도로개설로 1920년대 후반에는 개통되어 교통이 편리하게 되었다.   ② 해상교통(海上交通)   곤양에서 부산을 갈려면 진교에 가서 기선(汽船)편으로 갈 수 있고, 또는 광포에서 작은 배를 타고 두 시간 걸려 선진(船津)에 가서 기선편을 이용해야 했다. 한일합방 후 이내 우리의 해운권(海運權)을 장악(掌握)하고, 1912년 부산기선회사가 조선우선회사를 흡수 합병하여 선진항을 개척(開拓)하고 진교항과 같이 일본에 쌀 수출(수탈) 항구(港口)로 지정하였다. 1925년 진주에 철도(鐵道)가 개통되기까지 경남 서부지방의 쌀 수출항으로 역할(役割)을 다했다. 그리고 1930년 전후해서 광포까지 신작로가 개통되어, 창고를 짓고, 하동군 북천면에서 산출되는 유명한 고령토(高嶺土)가 일본 대판(大阪) 방면으로 수출하면서부터 이곳의 해상교통도 편리해졌다.   6) 농촌지도위원회   1932년 12월 16일 곤양농촌지도위원회를 조직하여 창립회를 개최하고 자력갱생민심작흥운동(自力更生民心作興運動)을 유액(誘掖)해 지방민력(地方民力)의 행상을 기한다는 모임으로 위원장에 면장, 위원에는 면직원, 구장, 보통학교장, 소학교장(일인소학교), 우편소장, 주재소수석 금융조합이사 등으로 임명(任命)됨.   7) 병원 개원과 곤양위생조합 설립   1913년 일인들과 같이 조직하여 청결위생에 힘썼으며 회장에는 이광종(李光淙)이였다. 체육위생상의 기관시설로는 특기할만한 것이 없었고, 지금 낙홍정 위치의 아래쪽에 사장(射場)이 있어 활을 쏘고 궁도회(弓道會)를 갖기도 했으나 일인(日人)들은 보통학교 교정에 정구장을 설치, 수시로 경기장을 개방하였으나 일반화되지 않았다.   1927년 봄에는 성내리와 남문외리를 중심으로 해서 인근(隣近)에 장질부사 전염병이 만연해 그 발병 원인을 조사한 결과 음료수(飮料水)가 불량한 탓 이였기에 수질(水質) 개선(改善)이 급선무였다. 그래서 강재관(姜在寬) 면장이 1927년부터 1929년 3월까지 간이(簡易) 상수도 공사를 준공하고, 이어서 1929년부터 1931년 6월 사이에 정식(正式) 상수도 공사를 착공하여 준공하므로 성내, 남문외리 전역과 송전, 서정 일부 거주민에게 급수하게 되었다. (총공사비 6,500원으로 지방보조금 1,950원 면비 4,550원이 소요됨.) 이때, 병원(病院)이 있어야겠다는 것이 주민들의 숙원(宿願)이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때, 전염병(傳染病)이 만연해 공의(公醫) 배치의 후보지(候補地)로 지정되면서 요원(要員)이 부족할 때였지만 적극적인 맹활동으로 1934년에 홍의관(洪義寬) 의원(醫院)이 개원되었다.   8) 공동묘지 설치   종래(從來)에는 묘지(墓地)를 명당(明堂) 찾아 각지에 산재(散在)되어 있었으나, 1914년 면내 이동 요소에 공동묘지(共同墓地)를 설치해 장례문화(葬禮文化)에도 큰 변화가 생기게 되었다.   9) 곤양에 전깃불이   1900년에 서울에 전깃불이 밝혀졌고, 1926년에 사천전기주식회사가 발족되고, 1930년 8월 16일 진주지점 사천출장소가 설치됨에 따라 성내ㆍ남문을 중심해서 곤양 일부에도 전등을 밝히게 되었다. 확실한 연대가 기록된 자료는 없으나, 1930년대 초에 전기가 들어온 것만은 틀림이 없다.   10) 학교   사립곤양개양학교를 1911년 6월 1일 곤양공립보통학교로 개칭하여 개교하였고, 곤양 공립심상소학교(일인학교)는 지금 면사무소 앞 장춘공원 위치에 1916년 10월 16일 개교하게 되었는데 학교관계 내용은 따로 밝히고자 한다.


담당자
문화체육과 문화예술팀 055-831-2714
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만족도 조사 민원신청  시장에게 바란다  조직도  공지사항  공고/고시/시험 
페이지 수정요청열기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시나요?

평가: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