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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제5절 일본징용희생자 목격증언   일본 제국주의가 1930년대 후반 만주 사변,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식민지 민족 신세가 된 조선동포들은 강제적으로 전쟁과 징용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이렇게 끌려 가 비참한 환경과 열악한 조건 속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 굶주림, 고된 노동 속에 억울하게 죽어간 동포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겠지만, 여기서는 함께 징용에 끌려가서 이웃 동료가 당한 모습을 생생하게 목격한 곤양면 중항리의 목격자 증언을 소개한다.   (경남신문, 1990년 8월 16일자 기사).   경남신문 기사

경남신문 기사

  곤양면 중항리의 최수조(崔壽祚)씨는 50년 전 악몽을 되씹으면서 생각하기조차 싫은 체험ㆍ목격담을 말했다. 최씨가 징용된 것은 19세 때인 1939년 이웃마을 친구인 신삼윤(당시 20세)과 함께였다.   곤양과 서포면 등지에서 온 징집자들과 진주역에 집결하여 열차로 부산으로 간 후 이틀만에 시모노세끼(下關)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다시 배치된 곳이 시모노세끼(下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장생탄광이었다.   채탄 광부는 360명으로 180명씩 2교대로 일을 하였다. 새벽 4시부터 하오 4시까지, 하오4시부터 다음 날 새벽4시까지 꼬박 12시간을 채탄하여야 하는 고된 중노동이었다. 혹서와 혹한이 교차하는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 돌아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버티었다. 손발이 부르트고 피로에 지쳐 쓰러진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광부는 한국인을 비롯하여 중국인 일본인들도 다수 있었다. 사고는 탄광에 배치된 지 10개월이 지난 1940년 6월 어느 날 새벽이었다.

  동향인 신씨와 근무교대를 하고 최씨는 막사에 잠깐 쉬고 있었다. 갑자기 꽈앙하는 폭음과 함께 광부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바다 밑으로 통하여 있는 갱도가 물의 압력을 받아 누수현상을 보이다가 구멍이 커지면서 갱도 안으로 물이 쏟아져 들어와 함몰된 것이었다. 전기와 공기공급이 중단된 암흑천지의 갱내는 그야말로 아비규환의 지경이었다. 그러나 구조는 불가능한 상태였다. 갱도는 물, 석탄, 돌멩이들로 가득차 붕괴되었다. 순식간에 180명 전원이 몰살(沒殺)되었다. 이 중 130명은 한국사람 이었다. 일제는 뒤늦게 복구 작업을 착수(着手)하였지만, 장비부족을 이유로 중단하고 말았다.   그로부터 50년 전쟁은 끝나고 일본은 경제대국으로 성장하였지만, 사고규명은 물론 억울한 죽음들에 대하여 아무런 위로의 조처조차 하지 않았다. 사고 직후 최씨는 탄광을 탈출하여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군무원으로 행세하다가 천신만고 끝에 1944년 귀국선에 오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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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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