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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제1절 곤양개요   일제강점기란 보통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시대 36년(1910~1945) 동안의 기간을 말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1905년 을사 보호조약이 강권에 의하여 체결되고, 다음 해인 1906년에 이등박문이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조선 반도는 주권(主權)을 완전히 잃어버린 국민으로 전락하였기에 실제적 통치기간은 더 길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지경이 되기까지의 정황을 간략하게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후기 조정내부의 지배계급들의 분열(分裂) 즉 개화파(開化派)와 수구파(守舊派)의 대립으로 국세(國勢)가 약화되었고 이것을 기화(奇貨)로, 열강제국들 , 특히 일본과 중국 그리고 러시아는 무엇보다도 지리적으로 인접하여 있다는 지정학적 여건을 토대로 하여 조선내정에 끝없이 간섭해 왔다. 하지만 국내의 정파들은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세가 이렇게 복잡하게 전개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헤게모니 장악의 당쟁에만 골몰하여 국민의 내부적 결속을 다지기 보다는 오히려 외국세력과 결탁하여 상대정파를 몰아내고 조선 정부를 약체(弱體) 정부로 만들어 나가는 데에만 급급해 하였다. 임오군란(壬午軍亂 : 1882, 고종 19년)과 갑신정변(甲申政變 : 1884, 고종 21년) 등이 그 좋은 예이다. 이러한 복잡한 시대상황으로 인하여 사회는 혼란해지고, 백성들의 삶은 어려워져 자연스럽게 사회적 혁신(社會的 革新)을 요구하게 되는 분위기가 증폭되게 되었고, 이러한 시대적 요구에 따라 동학혁명(東學革命 : 1894, 고종 31년)이 일어났다. 이것을 빌미로 청일전쟁(淸日戰爭 : 1894, 1895)이 발발하였으며, 그 결과 일본이 승리하여 동학혁명자체도 실패하게 되었다. 이런 관계로 갑오경장(甲午更張 : 1894)이란 사회전반에 걸친 일대 변혁으로 개명(開明)과 자주독립이란 표방(標榜)을 내세우고 노력하였지만, 기반이 약한 국력 때문에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하고 일본의 침략(侵略) 기반(基盤)만 마련해 준 셈이 되고 말았다. 이런 와중(渦中)에 노일전쟁(露日戰爭 : 1904, 1905)이 일어났고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 : 1904. 2)ㆍ한일협약(韓日協約 : 1904. 8)ㆍ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 : 1905. 11) 등의 조약들이 연달아 숨 가쁘고 정신없이 체결되고, 따라서 한국에 통감부(統監府)를 두게 되었으며 외교권은 박탈(剝奪) 당하고 곧 일본은 절대적인 세력을 갖게 되었다.   비록 한일합병(韓日合倂)은 1910년이지만, 사실은 그보다 훨씬 앞선 1906년 12월 25일에 우리 곤양에 일제가 순사주재소(巡査駐在所:소장 梶美幾太郞)를 성내동에 설치하였고, 경찰력만으로도 부족하여 1907년에 곤양 수비대(守備隊:隊長○○ 特務兵曹)란 명목으로 군대까지 주둔(駐屯) 시켰다. 수비대의 주된 임무는 지방의 항일 운동자를 색출 탄압하기 위함이었다. 그것도 미덥지 않아 1908년에는 수비대를 곤명 원전으로 철수하고 곤양 헌병파견소(憲兵派遣所:소장 中野 曹長)를 두고 경찰사무(警察事務)까지 취급하면서 우리의 독립애국지사(獨立愛國志士)를 폭도(暴徒)로 단정(斷定)하고, 진정(鎭定)시킨다는 구실로 억압(抑壓)ㆍ검거(檢擧)ㆍ구속(拘束) 등 형포(詗捕)를 자행(恣行)하여, 그럼으로써 항일운동을 차단하여 조선의 말살정책을 획책하여 나갔다. 1917년에 헌병분견대를 폐지하면서 업무를 경찰(警察)에 인계하고, 1919년에 제도(制度) 개정(改正)으로 곤양순사주재소를 곤양경찰관주재소(昆陽警察官駐在所)로 개편하고 주재소에는 3명의 경찰직원이 근무하였다.   1910년 8월 29일, 대한제국 황제를 대리한 이완용(李完用)과 일본국 황제를 대리한 조선통감 데라우찌(寺內正毅)는 대한제국을 일본에 흡수시키는 <한국병합에 관한 조약>을 공포하였다. 또 이날 순종 황제는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넘긴다는 내용의 양국(讓國)조서(詔書)를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건국한 지 27대 5백 19년, 그리고 대한제국이 수립된 지 16년 만에 종말(1910. 8. 29)을 고하고 말았다. 주권을 강탈한 일제는 1906년 2월에 설치되었던 통감부(統監府)를 폐지하고 총독부(總督府)를 설치하여 한국통치의 전권을 장악하고 조선식민통치에 들어갔다. 데라우찌 이하 역대 총독은 현역 육해군 대장으로 임명하여 헌병경찰제를 실시하였다. 총독부에는 5부와 9국을 두고 그 직속기관으로 중추원(中樞院), 경무총감부 등이 있었는데, 무단정치의 중심 기구는 헌병경찰제도의 본거지인 경무총감부였다. 일제는 언론, 집회를 금지시키고, 총독부에 비협조ㆍ반대하는 사람들을 불령선인(不逞鮮人)이라 하여 불온 인물로서 검거ㆍ투옥하였다. 뜻있는 애국지사들은 만주ㆍ시베리아ㆍ중국ㆍ미국 등지로 망명하였고, 국내에서는 지하운동으로 일제에 항거하였다.   1906년에는 곤양에 우편소가 설치되어 3일에 한번 씩 우편을 배달하였으며, 1911년 3월 21일에는 공중전화가 개통되었다. 같은 해 6월 1일에는 사립(私立) 개양학교를 공립보통학교(교장 大森八郞)로 개명하였다가, 11월에는 곤양공립보통학교로 개명하였다. 이어 일본어를 보급하게 위하여 보통학교내에 곤양국어(= 일본어) 야학회(회장 이광종, 교장 岩○)를 개강하여 일본어 보급에 박차를 가하였다. 한편 이와 동시에 곤양에도 일본인들이 들어오기 시작하였고, 이들이 참여하는 여러 조직들이 만들어 지게 되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1913년에 조직된 곤양위생조합(회장 이광종)을 들 수 있다. 주로 곤양에 주재하는 일인들이 여기에 관여하였으며, 우물의 위생관리를 위해 공동우물을 수리 보완하는 작업을 하고, 당시 보수시 사용한 돌에 위생정호(衛生井戶)라고 음각(陰刻)하여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1907년 5명의 일본인이 성내에 5곳의 잡화점(雜貨店)을 개점하여 일본에서 가져온 물품과 석유 등의 신상품을 판매하면서 상권(商圈)을 늘려 나갔다. 이 때 우리 동포들은 장날이면 노점상이나 내고 술을 파는 주막만 경영하였다고 하니 돌이켜 보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었다.   당시 교통으로 육로는 원전을 거쳐 진주로 가서 기차와 기타 교통수단을 이용하였다. 수로교통을 보면, 곤양에서 부산으로 연결되는 주된 항로로 두개의 노선(路線)이 있었는데, 첫째는 진교까지 가서 배(汽船)를 타고 가는 해로이고, 둘째는 광포에서 작은 배를 타고 2시간 정도 걸려서 선진까지 가서, 선진에서 부산행 기선을 타고 부산까지 왕래하는 해로가 그것이다   당시의 곤양면 현황 및 개괄적 실태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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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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