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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제5절 곤양군의 사회ㆍ경제   곤남(양)군의 토성박이는 전(全)ㆍ문(文)ㆍ유(兪) 3성이었다.   다음은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곤양군의 경제ㆍ사회적 환경이다.

<표 3> 곤양군의 경제ㆍ사회적 환경 [세종실록지리지]
군명토질기후호수인구간전(결)비고
합계수전(水田)토의(土宜)
곤남군
(肥)
따뜻함271호1,300명1,824논이 조금 많다벼ㆍ기장ㆍ콩ㆍ조어염소 3
도기소 2
<곤남군(곤명현, 남해현 합병 초기)>   <표 3>의 인구수는 여자의 수치를 제외한 남자만의 인구수로 보인다.   곤양의 농산물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벼, 기장, 콩, 조이다.  <세종실록지리지>(1454) 곤남(양)군조에는 “자기소(磁器所)가 2이니, 하나는 군 남쪽 포곡리(蒲谷里)에 있고, 하나는 군 동쪽 노동(蘆洞)에 있는데 모두 중품이다.” 라고 하였다. 또 <경상도속찬지리지>(1469) 곤양군조 공철조(貢鐵條)에 “곤양에서 정철(正鐵) 409근을 매년 해마다 세공(歲貢)으로서 바치고 있다.”라고 하고 있다. 즉 곤양군 관내에 채철장(採鐵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당시 곤남(양)군에 있었던 자기소는 사영(私營)이 아니고 관영수공업장(官營手工業場)인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두 자기소에서 생산되는 자기조각에는 곤(昆), 남(南), 장(長) 즉 곤남군과 장흥고(長興庫)를 뜻하는 명문(銘文)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장흥고는 조선시대 때 포필(布匹), 종이, 돗자리 등을 맡아 보던 관아(官衙)이기도 하다. 또 단종 원년(1453)의 기록에 “사천ㆍ고성ㆍ곤양ㆍ거제 등 4개 고을을 아우르는 사천 도회소(泗川都會所)가 설치되어 군기(軍器)를 제조했다.”42)는 것으로 보아 관영수공업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을 생산하는 장소로 향소부곡이 있는데 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세종실록지리지>보다 32년가량 뒤에 나온 <동국여지승람> 고적조에 의하면 각 군현의 향ㆍ소ㆍ부곡ㆍ처ㆍ장 등이 표기되고 있다. 곤양군조에는 유실부곡(有實部曲)ㆍ금양부곡ㆍ포곡소ㆍ반룡소(盤龍所)ㆍ다음향(多音鄕)등 향1, 부곡2, 소2개가 보인다. 향(鄕)ㆍ부곡(部曲) 등의 기원은 삼국시대부터이며, 주ㆍ현처럼 정규 지방 행정조직이 될 수 없는 작은 규모의 고을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특히 소(所)는 옛날부터 천시의 대상이 되어온 광업 및 수공업 종사자들의 집단 거주지였다. 처ㆍ장도 왕실ㆍ사원 등에 경제적으로 예속된 하층신분의 소유자들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즉 향ㆍ소ㆍ부곡ㆍ처ㆍ장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일반 양민들과는 다른 신분인 천민들이었으며, 따라서 많은 불이익과 제약을 받으면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고려시대의 경우 이들은 국학에 입학하여 공부한다거나 과거에 응시 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고, 조세ㆍ역역(力役)의 면제 등으로 사회ㆍ경제적 특권층의 일종이었던 승려도 될 수 없었다. 이들은 노예와 같은 형제(刑制)를 적용 받고 있었고, 자녀들조차 천민으로 귀속되기 때문에 신분 상승의 기회가 원천적으로 봉쇄되어 있었다. 이러한 엄격한 신분상의 제약으로 인하여 일반인들과 함께 거주 할 수 없기 때문에, 이들은 특정지역에 집단으로 모여 살면서 농사일, 소금 굽기, 금ㆍ은ㆍ동ㆍ철 등의 채취 가공, 가죽 및 기타 각종 생활용품을 생산하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다.   덕치주의 및 민본사상을 근본으로 한 조선조에서는 이런 차별에 의한 지방행정지역을 처음부터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향ㆍ소ㆍ부곡ㆍ처ㆍ장으로 불리워지는 지역명은 사라지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천민들의 집단거주지는 일반 면ㆍ리 조직으로 완전히 흡수되었다.   향ㆍ소ㆍ부곡은 세종조까지에는 어느 정도 잔존하였지만 성종조에는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후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에 많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미 사라져버린 지명들을 밝혀 두고자 하였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향ㆍ소ㆍ부곡은 대체로 남부지방에 집중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천의 관해곡소는 병기를 제작하는 곳으로 보아야 하는 것은 사전총통, 팔전총통의 명문과, 정철을 진주에서 550근, 사천서 360근, 곤양에서 409근의 생산하여 공납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경상도속찬지리지>(1469) 곤양군의 포곡소와 반룡소에 대하여,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도기소가 두 곳 인데, 하나는 포곡리에 있고, 하나는 노동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동국여지승람>에는 노동의 소는 없어지고 반면에 반룡소가 나타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 진주목조에 “자기소가 셋인데, 그 중의 하나는 주의 남쪽 반룡진(盤龍津)에 있고, 단지 누른 옹기만을 만드는데 하품이다.”라고 하고 있다. 이 반룡진의 소는 세종대에 진주에 속했다가 성종대에 직촌화되어 곤양군에 편입되었고, 옹기 및 도자기를 생산하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곤양의 수산자원을 보면 (1) <경상도지리지>(1425) 공부조(貢賦條)에 문어(文魚)ㆍ홍합(紅蛤), (2) <세종실록지리지>(1454) 공부 및 토산조(土産條)에 문어ㆍ홍합ㆍ생포(生鮑)ㆍ미역ㆍ은어ㆍ해삼 (3) <신증동국여지승람>(1530) 토산조에 문어ㆍ대구어ㆍ굴ㆍ전복ㆍ언어ㆍ오징어(烏賊魚)ㆍ전어(錢魚)ㆍ홍어ㆍ낙지ㆍ게ㆍ미역ㆍ해삼ㆍ김(海衣)ㆍ농어ㆍ숭어ㆍ조기 (4) <곤양읍지>(1832) 토산 및 진공조에 토산으로 미역ㆍ전복ㆍ해삼ㆍ홍합ㆍ게ㆍ굴ㆍ김ㆍ문어ㆍ황어ㆍ은어ㆍ조기ㆍ숭어ㆍ전어ㆍ낙지ㆍ오징어ㆍ대구ㆍ가오리ㆍ농어, 진공으로 마른 전복ㆍ마른 홍합ㆍ마른 해삼ㆍ피문어ㆍ마른 전어ㆍ전복ㆍ해삼ㆍ김ㆍ미역ㆍ우무가사리ㆍ참가사리 등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시대의 <지리지>와 <읍지>에 수록된 곤양군의 「토산, 공부조」에 나타난 수산물의 종류는 후기로 내려올수록 다양해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어업 기술의 발달로 말미암아 포획 또는 가공이 가능한 수산 동식물의 종류가 많아지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수산업의 역사적 형태는 어량어업(魚梁漁業)에서 출발한다. 어량이란 어로(魚路)에 방죽(防竹)을 세우고 신렴(薪簾)을 벌려 임통(扉桶)을 설치하는 정치어구(定置漁口)를 말한다. <세종실록지리지>(1454)에 의하면 경남의 어량은 곤남군(곤양군의 전신)의 1개소를 포함한 6개소에 불과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반하여, <경상도속찬지리지>(1469)에는 사천현, 곤양군을 포함하여 경상도에만 32개 지역에 어량이 분포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동 지리지 「곤양군조」에 의하면 군의 남쪽 금양포(金陽浦)에 어량이 설치되어 홍어(가오리), 문어, 전어를 포획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그 뒤에 편찬한 <신증동국여지승람> (1530) 「곤양군조」를 보면 한 군데 밖에 없던 어량이 이때가 되면 수없이 증가한 점이다. 즉 노량(露梁), 아방포(牙方浦), 모랑포(毛郞浦), 성창포(城倉浦), 염전포(鹽田浦), 구량포(仇良浦), 율포(栗浦), 진제포(辰梯浦), 포곡포(蒲谷浦), 대포(大浦), 강주포(江州浦), 그리고 금양포 등 12개소가 그것이다. 대개 개포(浦)자가 붙은 갯가의 작은 항구(港口)에는 거의 다 어량이 설치된 셈인데, 이 가운데 노량(수군 만호영), 진제포, 포곡포, 금양포 등지는 오늘날 하동군의 관할이다.   다음은 소금생산에 관한 부분이다. 당시 농경사회에서는 쌀과 소금이 가장 기본적인 생활필수품이자 경제의 기본 단위였다. <세종실록지리지>(1454) 곤남(양)군조에는 어염소(魚塩所)가 3이니, 모두 군 남쪽에 있는데 염창이 있어 염장관이 감독해 지킨다고 하고 있다. 소금은 관에서 주로 생산하되, 일반인도 국가의 허락하에서 소금을 제조할 수 있었다.   15세기 <경상도지리지>에 나타난 곤양ㆍ사천지방의 염분과 염업의 현황을 살펴보면 조선전기 곤남군에 공염분(貢鹽盆) 249좌(坐), 수군보군항염분(水軍堡軍項鹽盆)4좌, 사염분(私鹽盆)25좌로 곤양의 총염분ㆍ염업은 278좌, 사천현에 공염분(貢鹽盆) 23좌(坐), 사염분(私鹽盆)21좌로 사천 총염분ㆍ염업은 44좌, 이것을 모두 합하면 322좌로, <세종실록지리지>에 수록된 8도 염분이 모두 1,362좌인 것을 감안하면 곤양ㆍ사천의 322좌는 전체 염분의 23.6%이므로 거의 1/4에 해당된다. 8도에서 곤양지방이 차지하는 염분은 20.4%로 전체의 1/5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염분(鹽盆) 또는 염부(鹽釜)라는 것은 바닷물을 끓여 졸여서 소금을 만들 때에 쓰는 큰 가마이다.   곤양연안은 자염(煮鹽)이라 하여 소금 굽기에 적합한 염분(鹽盆)이 바닷물에 많았고, 바닷물을 끓이는데 필요한 시목(柴木)도 야산이 많았기 때문이다. 곤양군의 염전은 군 동쪽 가리리(加利里)의 아방포(牙方浦), 모랑포(毛郞浦), 길안리(吉岸里)의 성창포(城倉浦), 염전포(鹽田浦), 구랑포(仇良浦), 대정리(大庭里)의 율포(栗浦), 금양진제포(金陽辰梯浦)등 7개처에 있었는데 모두 어량이 있던 곳이다. 오늘날 곤양지역에 염전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면서 옛날 염전 생산지로서의 명성을 상실한 것 같아 아쉬움이 크다.   조선전기에 사천지방에 있었던 272좌의 공염분은 관염을 제조하는 공염분(貢鹽盆)으로서 염창(鹽倉)은 물론 염장관(鹽場官)이 파견되어 감수하고 있었다. 염역을 신역으로 삼는 염간을 이 염분으로 제염하여 관에 일정액의 소금을 세금(稅鹽)으로서 납부하였다.   조선전기에는 수군의 각 영ㆍ진ㆍ포에 관둔전ㆍ염분ㆍ어장을 설치하고 수군과 공천을 사역하여 곡물ㆍ소금 등을 생산하고 어패류ㆍ해조류를 포획ㆍ채취하여 군량 등 군수에 충당하였다. 수군의 염역은 견디기 어려운 고역이었다. 수군의 여러 포(諸浦)에서 생산한 소금은 곡물과 바꾸어 군량에 충당하고 또는 흉년에 기민구제(飢民救濟)를 위한 구황염(救荒鹽)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리고 곤양군 관내 공염분ㆍ군수염분 및 사염분에서 생산한 소금은, 세염은 지방 염창에 수저(收貯)하여 소비자인 지방민의 쌀 또는 포와 교환(판매)하고, 나머지의 것은 염소에서 직접 민간에 판매하였다   19세기 말 곤양면에는 4,177호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인구 및 호수에서 보면 곤양군은 지금보다 월등하게 큰 규모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英祖) 41년에 완성된 <여지도서(與地圖書)>의 「진주진」, 「곤양군읍지」에 따르면 곤양군에는 10방면(坊面)이었다. 동부면(東部面)ㆍ가리면(加利面) : 현재 곤양면(昆陽面), 초량면(草梁面)ㆍ소곡면(所谷面)ㆍ성방면(城方面)ㆍ곤명면(昆明面), 서부면(西部面)ㆍ양포면(兩浦面) : 지금의 서포면(西浦面), 금양면(金陽面) : 지금의 하동군 진교면(辰橋面), 서면(西面) : 지금의 하동군 금남면(金南面) 10개 방면이 그것이다.
  42)<端宗實錄> 권 6, 원년 6월 9일 甲午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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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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